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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세무인] 레슬링 선수 출신 ‘오뚝이’ 박광하 세무사
[이색 세무인] 레슬링 선수 출신 ‘오뚝이’ 박광하 세무사
  • 이대희 기자
  • 승인 2022.11.15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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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좋아 명문고 입학 후 레슬링…특기생으로 대학 진학, ROTC 장교
-7년의 학문 공백, 악바리 근성으로 전문자격사 꿈 이뤄낸 ‘파란만장’ 삶
-“어머니 지극 정성과 가난 속 아내 헌신이 세무사 만들었다” 눈시울 붉혀
레슬링 선수 출신의 박광하 세무사. 운동 선수로서 전문자격사인 세무사가 되기까지의 힘들었던 인생 역정을 얘기하며 활짝 웃고 있다. 

“철없던 시절 운동이 좋아 레슬링을 했고, 가족과 주변의 보살핌으로 70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조세전문자격사로서 일을 하고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죠.”

고등학교와 대학 7년의 운동선수 생활로 인한 학문적 공백. 그럼에도 ‘악바리’ 근성으로 당당히 세무사 자격을 취득해 40년 가까이 업을 영위하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박광하 세무사 얘기다.

열악한 환경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낸 삶이지만 인터뷰 중 그는 성공담 대신 가족과 지인의 배려와 도움에 대한 ‘감사’로 일관했다. “모두들 그렇게 사는데...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는 말과 함께.

레슬링 선수 출신의 박광하 세무사. 현재 5명의 직원과 함께 서울 을지로3가에서 안정적으로 세무사사무소를 꾸려가고 있다. 거래처도 탄탄한 편이다.

조세전문자격사인 세무사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어려운 환경에 꺾이지 않는 ‘오뚝이’의 삶이었다.

중학교 때 상위권을 유지했던 박 세무사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문고 대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유명 상공인을 많이 배출한 실업 명문이었고, 졸업 후 은행 등의 취업이 보장됐을 때다.

그런데 입학 후 박 세무사는 운동이 좋아 레슬링을 시작했다. 기량이 뛰어나 부산경남의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자질을 눈여겨 본 동아대 레슬링 감독의 권유로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국가대표 발탁 기대로 열심히 운동했다. 하지만 선발 과정은 실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크게 낙담한 박 세무사는 2학년 초 어릴 때 꿈꿨던 군인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고 ROTC(학생군사훈련단 9기)로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고교 3년과 대학 4년, 7년간의 학창시절은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운동선수 이력은 1973년 장교로 제대 후 직장을 잡는데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군사정권 시절 대기업들은 장교 특별채용을 많이 했지만 ‘체대출신’ 꼬리표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연이은 고배로 좌절감이 컸으나 실의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빚보증으로 파탄 난 집안 부양에다 이미 꾸린 가정의 생계를 위해 열악한 중소기업도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7년간의 학업 공백을 극복하고 세무사시험 합격을 가능하게 했던 박광하 세무사의 '필사'와 '암기'의 흔적. 사진은 세무사사무소의 벽면에 붙여 놓은 업무에 필수적인 사항을 정리해 놓은 자료.

7년 학업 공백, 10년 주경야독(晝耕夜讀)해 극복

이때부터 10년에 걸친 주경야독의 고난이 시작됐다. 취업을 위해 헌책방에서 구입한 실업계 고등학교 교재인 ‘기업회계 기준’을 공부했다. 공부를 손 놓은지 7년 만에 상고 과정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친척 소개로 들어간 중소기업은 박봉에 근무환경이 열악했다. 상고 출신으로 경리업무를 맡았으며 주업무 이외에도, 비철금속 현장의 거친 직원들을 다루는 총무업무도 겸했다.

“직장 생활 3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이렇게 계속 살아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세무사’를 목표로 본격적인 독학에 돌입했다. 공부라지만 학원은 언감생심, 낮에 일하고 자청한 야간당직과 자투리 시간 활용이 고작이었다. 월급 10만원 정도일 때 당직비가 2천원이어서 어려운 형편의 박 세무사로선 ‘꿩 먹고 알 먹기’라 애써 자위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기초가 전혀 없는 상태였지만 그나마 다행은 회계가 적성에 맞았고 특히 암기에는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생님께서 칠판에 예수님 12사도의 이름 적었다. 12사도를 장난삼아 외운 그는 다음 날 선생님께서 ‘예수 12사도를 아는 사람 손들라’는 말에 혼자 손을 들어 “베드로, 안드로, 야보고, 요한 빌립,......가롯 유다”라고 거침없이 읊어 나갔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 그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던 대답을 들은 선생님이 놀라며 큰 칭찬을 했다. 담임선생님의 이 칭찬은 그의 공부에 대한 용기를 주었고 후에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고 이야기한다.

ROTC중앙회 발전 기여 공로패

ROTC 지원 때도 그랬다. 시합 등으로 부족했던 10학점을 체육과는 동떨어진 서예, 사진학, 현대문학사 등을 주야로 수강해 단 6개월 만에 이수했다. “현대문학사 과목은 ‘낙동강 파수꾼’의 저자인 요산 김정한 선생이 강의했는데 ‘플로레타리아 문학가의 역사를 적으라’는 시험이 나왔고, 98점을 받아 1등을 했다”며 자랑스러워 한다.

그렇다고 그가 한 번 보고 들으면 깨치는 ‘천재’는 아니다. “세무사시험 대비 때 주요 과목의 요지와 세법조문은 모두 필사를 했고, 이를 통째로 달달 외웠다”고 털어놨다. 7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집의 방과 화장실에 붙여놓고 반복해 외웠고, 회사에서는 필사본 노트를 보며 다시 숙지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뜻 모르고 외웠던 것이 뒤에는 모두 이해가 됐다”고 했다.

이런 노력과 치밀함은 주경야독 10년 만에 세무사 합격의 영광으로 이어졌다. 세법 관련 예규나 판례, 법 개정 사항을 메모하고 통째 외는 것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포기하면 안 돼요” 아내 말에 용기얻어 ‘늦깎이’ 합격

학창시절 공부와 담쌓은 레슬링 선수를 전문자격사, 세무사로 거듭나게 한 것은 가족의 사랑과 헌신이었다고 박 세무사는 말한다.

7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참 곱고 인자하신데, 나를 위해 모든 걸 바치셨다. 사고(?)라도 치면 어디든 자식 대신 달려가신 분”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식을 혼내는 대신 ‘제발 운동하는 것 표내지 마라’는 당부가 전부였는데 그 때는 그 마음을 왜 몰랐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02세로 타계하신 어머니의 100세 생신잔치 때 박 세무사는 틈틈이 배운 아코디언으로 어머니가 좋아하는 ‘타향살이’ ‘청실홍실’ 등을 울음을 삼키며 연주해 작은 보답의 인사를 드렸다고 했다.

‘세무사 박광하’를 만든 이는 이런 어머니와 함께 “찢어지는 가난에도 헌신으로 일관했던 아내였다”고 그는 몇 번씩 되뇌었다. 남동생의 대학 입학후 준비한 사법시험 뒷바라지를 위해 중소기업 박봉의 절반을 떼어내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고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세무사시험 공부를 할 때는 생계를 위해 ‘고무대야’를 이고 미취학인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어묵을 팔러 나서기까지 했다며 눈가를 훔쳤다.

서울법대 3학년 때 어려운 형편으로 ‘사시를 포기하고 은행 취업을 하겠다’는 동생을 만류해 끝까지 보살핀 장본인이 박 세무사였고, 동생은 그보다 2년 앞선 1982년 사법시험에 붙었다. “나 자신의 합격보다 더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내가 사는 버팀목이기도 했다”며 연신 동생 칭찬이다. 동생 박영하는 부장판사를 거쳐 중견 법무법인의 대표를 지냈으며 현재도 명망 있는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서른일곱의 늦깎이로 세무사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고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세무사시험에 떨어졌을 때다. 수원 국세공무원교육원까지 가서 발표를 보고 온 아내가 “‘이런 점수면 내년에 꼭 되니 걱정 말고 남편 잘 챙겨주라’고 교육원 관계자가 말했다”며 “포기 말고 다시 도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시험에서 낙방해 허물어질 듯한 그에게 아내의 그 한마디는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고난의 수험생활을 지탱하게 해준 아내에게 40년 지난 지금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고 한다.

오늘의 세무사 박광하를 있게 한 고마운 가족. 사진 아래가 어머니 조종임 여사, 오른쪽이 부인 진성자 여사, 왼쪽이 아들 근호씨.

가족의 응원은 그의 각오를 더 단단하게 했다. 수험준비 시절 공부시간이 너무 부족해 명함을 붙여 만든 메모지에 빼곡히 적은 수험자료를 보며 길을 걸었는데, 그 모습을 광화문 거리에서 친형님이 우연히 보게 됐다. 계절에 맞지 않는 허름한 옷과 낡은 가방을 들고 메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걷는 동생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오열을 했다고 한다.

형님은 느지막에 책을 든 그를 대견하게 여기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984년 마침내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막내 동생의 사시 합격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다고 말씀하신 작고한 큰 형님의 상기된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박 세무사는 애틋해 했다.

그의 사무실 칠판에는 거래처 특이사항, 세무처리의 주의할 점 등이 빼곡히 적혀있다. 매일 아침 9시 회의를 열어 직원들로부터 거래처 불편사항과 서비스의 미비점 등을 점검한다. ‘세무사’로서 어떻게 납세자 편익을 최대화할 봉사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박 세무사는 “어려운 여건에서 주변 도움으로 과분한 전문자격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 보답은 세무사로서 납세자 권익보호에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니겠냐”며 납세자에 대한 감사의 삶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1947년생의 70 중반인 그는 운동으로 다진 단단한 체력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레슬링선수 출신 세무사 박광하. 그의 인생 후반 멋진 한판 ‘폴(Fall)’ 승을 기대해 본다.

2013년 어머니의 100세 생일잔치 모습. 틈틈이 배운 아코디언으로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던 애창곡을 연주하는 박광하 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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