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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朝鮮때 세정전문가 어사 박문수 행적을 찾아서
[탐방]朝鮮때 세정전문가 어사 박문수 행적을 찾아서
  • 日刊 NTN
  • 승인 2014.02.1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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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박문수를 오래 기억하는 까닭, 세제개혁 통한 愛民 실천의 ‘명판관’

‘어사=박문수’라는 공식을 낳은 어사 박문수.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있는 은석산에는 어사 박문수의 묘소가 있다. 또 박문수의 종중인 고령박씨 종중재실은 은석산에 있는 박문수 묘소 아래에 위치해있다. ‘정의의 사도’로 알려진 박문수가 조선시대 세제개혁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던 개혁적인 인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 후기 백성들이 남자로 태어난 숙명까지 원망하며 자신의 손으로 남성을 거세하게 까지 만들었던 군역을 폐지하고, 임금과 세도가의 수입으로 들어가던 어염세를 부족한 재정으로 사용하자는 ‘위험한’ 주장을 서슴지 않아 당시 주류 계층이었던 노론의 ‘눈엣가시’였던, 어사 박문수의 행적을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은석산에 위치한 어사 박문수 묘(사진오른쪽하단)와 박문수 어사 묘 밑에 위치한 박문수 종중 고령박씨 종중 재실.
조선후기 군정·서민정치 앞장… 민중의 스타

세상이 혼탁하고, 어지러워질수록 사람들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심리학에서는 이 또한 일종의 보호본능 또는 방어기재의 발현이라고 한다. 국가 경영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민생의 곤궁 혹은 위기의 순간마다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을 소환해 진정한 국가 지도자로서 갖춰야할 자질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 또한 이러한 보호본능의 발현이라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벤담의 공리론 등을 비롯 철학자들의 ‘정의’에 관한 정의를 정리해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강의한 내용들을 모아 펴낸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돌풍도 우리시대가 바라는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가 얼마나 부패하고, 리더다운 리더가 없는 세상인지를 보여주는 단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문수는 ‘암행어사’ 아닌 ‘별건어사’
이런 때에 역사에서 현재가 갈망하는 인물을 소환해보자면 수많은 구전설화를 남긴 ‘어사’의 표본 박문수라 할 수 있다.    박문수(朴文秀 : 1691~1756)는 현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박장원(朴長遠)의 증손이고 박항한(朴恒漢)의 아들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진 뒤 훗날 판서에까지 올랐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이다. 

사람들은 흔히 박문수에 대해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박문수는 실제로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박문수의 경우는 어사로 파견되긴 했으나 암행어사가 아니라 ‘별건어사’로 파견됐다. 암행어사는 말 그대로 암행을 하는 어사지만, 별건어사는 도내 이름난 인사들과 만나 공개적인 업무를 수행하곤 했다. 박문수의 경우 4차례 정도 파견됐고(▲1727년 영남안집어사 ▲1731년 영남감진어사 ▲1741년 북도진휼사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 등), 영남 지방에만 파견됐으며, 어사로 활약한 기간도 1년 정도에 불과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박문수가 영조 3년(1727년) 9월부터 영남 별건어사로 몇 달 간, 그리고 영조 7년(1731년)에 호서 어사로 활동한 기록이 나온다. 채 2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두 번 어사로 활동했고, 파견 지역도 영남과 호서로 한정됐다.

그럼에도 박문수가 어사의 대명사 혹은 우리시대가 바라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00년대 초반 발행된 ‘어사 박문수전’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 저서는 박문수의 일화 뿐 아니라 조선시대 영웅들의 일화까지 모두 통칭 ‘어사 박문수전’으로 묶어 출간했기에 기록된 내용이 모두 박문수의 업적이라 할 수는 없다. 또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구전설화 1만 5000여편을 모아놓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인물 관련 설화 중 가장 많은 수(210여편)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어사 박문수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도 어사=박문수라는 등식을 사람들 뇌리에 각인시키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역사는 되풀이?’ 조선후기판 ‘종부세’ 논란
이런 사정으로 박문수의 업적이 오랜 세월 동안 심하게 포장되고 부풀려진 측면이 강하지만, 그가 백성들 구휼에 힘썼던 업적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끝 간 데 없는 경제위기와 연동된 국가 재정 위기 속에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역사 속에서 찾아보자고 한다면 박문수의 업적을 따라가 볼만 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박문수는 궁중 건물의 용도와 비용을 정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해 균역법 제정에 관해 공을 세웠다. 조정의 예산을 절약하기 위한 방책을 정리해 국가재정의 용도와 규제사항을 명확히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당시 점점 호화롭고 사치스러워지면서 백성에게 큰 부담을 주던 혼례의 절차와 비용을 새로이 정한 「국혼정례(國婚定例)」를 편찬한 공로도 세웠다. 한편으론 ‘세금’ 관련 백성들의 고충이 심해진 조선 후기, 양반에게도 세금을 걷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조선 주류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던 박문수는 일찍이 공평세금부담의 전제조건인 ‘하후상박’을 내세운 인물이라 평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파싸움이 극에 달하고, 노론의 세상이라 할 수 있는 영조시대 정치적으로는 소론으로 분류됐지만, 어느 한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면서 국정개혁에도 중요한 몫을 했던 박문수의 업적도 새롭게 조명해 볼만 하다. 특히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박문수는 관찰사 등 지방관으로서 군정과 세정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은 나날이 증가하는 세금이었다. 토지세와 더불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킨 군역(軍役)은 사회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조선시대 16세에서 60세 나이의 남자들은 군역의 의무를 졌다. 즉 군포(軍布), 조선시대 군정(軍丁)에게 역(役)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받던 베를 내야 했다.

군포는 16개월에 2필씩 냈는데 양반은 내지 않고 일반 백성들에게만 부과됐다. 군포를 내지 못해 일생동안 가꿨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농민들은 늘어만 갔고, 아울러 군포의 폐단 또한 갈수록 극심해졌다. 심지어는 군역의 의무가 없는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군포가 부과되기도 했다. 박문수는 이처럼 세금에 짓눌리고 폭정에 시달리는 조선 백성의 절망적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때문에 군역 문제해결의 시급함과 절실함을 또한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박문수는 군역 문제의 해결을 끊임없이 임금에게 요구했고, 마침내 영조는 두 필의 군포를 한필로 감하는 균역법을 단행했다. 나아가 박문수는 양반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군포를 대신해 부족한 세수를 보충할 수 있는 수단도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어장이나 염전에 부과되던 ‘어염세’를 국가 수입으로 전환하는 안이었다. 당시 어염세는 어민들이 왕실이나 권세가에게 받치던 세금이었다.

조선시대 주류를 형성하던 양반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양반과 세도가에게 돌아가던 수입을 국가 재정으로 돌리자는 주장을 거침없이 펼쳤던 박문수에 대한 노론의 반감은 자연히 거세질 수밖에 없다.

결국 박문수는 백성 구제 목적의 세금을 횡령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옥살이를 하지만, 임금 영조의 적극적인 구조로 혐의를 벗고 한 달 만에 옥살이에서 풀려난다. 이후 지방관료와 병조, 호조, 예조를 거쳐 현장에서 행정 실무를 쌓았고, 사후 충헌(忠憲)이라는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되기도 한 박문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관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수많은 설화를 남기고 그 설화만큼이나 개혁적인 성향으로 가치 있는 업적을 남긴 어사 박문수. 현 시점에서 대민봉사를 업으로 삼은 관료들이 박문수의 업적을 통해 아로 새겨야 할 부분은 개혁적인 성향만큼이나 민생을 우선에 두었던 그의 행정철학이라 할 수 있다.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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