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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鐘相의 세짜 이야기]
[金鐘相의 세짜 이야기]
  • 日刊 NTN
  • 승인 2014.04.1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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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교황의 한국방문-세 번의 큰 박해 딛고 주요 천주교 국가로

▲김종상 세일회계법인 대표

올해 들어 한국 천주교에 세 가지 경사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국민이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먼저 염수정 서울대교구장이 추기경에 서임된 데 이어, 조선시대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諡福)이 결정됐고, 오는 8월엔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1801년부터 70년 동안 세 차례 박해의 역사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세도정치 시대-천주교 박해-근대화의 시기 허송

조선의 22대 왕 정조(1776-1800)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라 실학을 바탕에 둔 개혁정책 및 탕평(蕩平)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였고,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노력을 기울이다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러자 둘째 아들 순조(1790-1834년)가 10살의 어린 나이에 제23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그 증조할아버지 영조의 계비 정순황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과 그 장인이었던 김조순을 비롯, 이른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제24대 헌종(1827∼1849), 25대 철종(1831∼1863)이 각각 8세, 18세에 왕이 되면서 이 세도정치의 병폐(病弊)가 계속되었는데, 세계의 주요 국가들이 근대화하는 중요한 시기를 우리는 허송했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이때 이루어진 대내외적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1700년대 중반부터 자생적으로 도입되어 뿌리를 내리던 천주교(외국 선진 문화)를 세번에 걸쳐 크게 탄압하여 많은 성직자, 신자들이 희생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014, 교황의 한국방문-세 번의 큰 박해 딛고 주요 천주교 국가로

우리나라의 천주교 전래는 세계 역사에 드물게도 외국의 선교사가 입국하여 종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구하고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500년대 말 중국에 전파된 천주교는 베이징을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처음에는 종교라기보다 서양문물(천주학 西學)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1700년대 후반부터 종교화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사신으로 떠나던 부친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승훈(1756-1801)이었다.

그가 귀국하여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신부의 역할을 대행하여 당시 양주군 천진암 등에서 천주교를 연구하던 이벽(1754∼1786)등에게 영세를 주었는데, 이때, 이 영세를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설(1784)로 인정하고 있다. 그로부터 10년 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천주교의 형식을 갖추면서,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천주교 탄압은 순조가 즉위하고 1년 후인 1801년 신유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유박해(辛酉迫害)라 한다.

이때는 천주교 신자들이 부모의 장례, 조상의 제사에 관련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것과 정조 때 부터 정권을 유지하던 남인(南人) 시파(時派)들 중 천주교 신자들이 많은 것을 빌미로 안동 김씨 등이 이들을 공격, 천주교를 박해하는 피바람이 불게 된 것이다. 이때 이승훈, 정약종 등 300여명이 처형되고 정약용 등 많은 이들이 유배를 갔다. 중국인 주문모신부는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최초의 외국인 순교자가 되었는데, 이때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는 오가작통(五家作統)법은 두고 두고 나쁜 선례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이 순교한 기해박해(己亥迫害,1839-46)

1834년 순조가 사망하고 또 어린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나라 전체가 흔들릴 만큼 세도정치의 주역을 다투는 싸움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천주교를 탄압한 기해박해가 발발했다.

이 당시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로 분리(1831년)되어, 프랑스 신부 세 사람이 들어와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세 신부를 비롯한 130여명이 순교하였다. 가장 아쉬운 것은 1937년부터 마카오에서 5년 동안 사제수업을 마치고, 최초의 한국인 신부가 된 김대건(1821-1846년)이 귀국하여 지하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스물여섯의 나이로 20여명의 신자와 함께 순교한 것이다. 최초의 신부로서만이 아니라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등에 능통하고 독도법 등 서양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천재성을 보이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유학생을 희생시킨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원군 집권 후,  발생한 병인박해(丙寅迫害1866-1870)와 병인양요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1863-1907)이 12살에 보위에 오르자 그 아버지 대원군이 60여년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폐해를 지우고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펼쳤지만, 반대파들이 천주교와의 연계를 주장하며 공격하였다.

처음에는 대원군이 그 이전 천주교 박해의 전례를 따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권 유지를 위해 강경책으로 돌아서면서 프랑스 두 주교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해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프랑스 군함들은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사형시킨 것에 항의하면서 강화도를 공격해 소위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진전되었다. 그러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져, 1870년까지 1만여명의 교도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니 조선의 세 차례의 천주교 박해 중 이때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런 피로 물든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통해 1984년 103위 성인으로 지정되었으며, 30년 후 다시 124위 복자시성(성인의 전단계)으로 우리나라는 순교자의 나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는 500만명이 넘는 신자와 4천여명의 성직자(신부 등)가 있는 세계 주요 카톨릭 국가 중 하나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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