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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가치세와 자료상’
‘부가가치세와 자료상’
  • kukse
  • 승인 2012.01.24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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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강 소장의 ‘택스 프로파일러(tax profiler)’<6>
   
 
  ▲ 허순강 본지 객원논설위원  
 
“영세업~대기업까지 자료상.가짜세금계산서 급증
국가근간 흔드는 부가세 근본적 재검토 이뤄져야”


역대 정권들의 부정부패, 수십년간 계속된 국세청장들의 수난을 ‘도덕성 문제’ 만으로 밝힐 수 없는 복잡다기한 요소들이 작용한다. 법률적ㆍ제도적 시스템의 장단점을 거론하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항이 많다.

우리는 세금의 심연을 보아야 한다. 국민에 대한 배려ㆍ철학적 고뇌ㆍ역사적 성찰과, 근본적으로 ‘조세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신년 특집으로 [허순강 소장의 ‘택스 프로파일러(tax profiler)’]를 연재하려고 한다. 허순강 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금작가로서 ‘세금 이야기’의 시대를 열었다. 그가 풀어나가는 이야기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세금의 문제점을 동ㆍ서양, 현재ㆍ과거를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자료상과 세무공무원을 사형시키는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과 서울의 ‘경복궁’의 규모의 차이만큼 중국과 한국의 조세처벌의 强度는 다르다.

중국에선 ‘자료상’을 死刑에 재산몰수까지 하고 있다. 중국의 인터넷경제매체 소후차이징(SOHU.COM. 2004.6.21.)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03년간 부가가치세(중국명 ‘증치세’) 세금계산서 위조범(우리나라의 ‘자료상’ 해당) 19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중 70명을 사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된 세무공무원은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4명을 처형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중국세법 내용을 보면 중국 ‘부가가치세 전용영수증의 허위발급 등 처벌 규정’ 1조ㆍ2조에서 “부가가치세 전용영수증의 허위발급 등을 한 경우 3년 이하 유기징역과 20만위엔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금액이 큰 경우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과 50만위엔 이하의 벌금을 처하고, 금액이 매우 심각한 경우는 무기징역과 동시에 재산을 몰수한다.

위의 금액이 특별히 크고 심각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공직자의 전언에 따르면 “중국의 빈민층들은 심각한 경제사정으로 목숨을 잃는 것을 알면서도 ‘자료상’ 행위를 하며, ‘자료상’으로 버는 금액은 상당하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와 우리나라를 상호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여 볼 만한 여지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자료상 실태는 어떤가?

2. 재벌 대기업까지 ‘가짜세금계산서’ 받는 한국의 실상

한국의 부가가치세는 1977년 7월 1일부터 시행되어 35년에 이르며, 이 세목은 긍정성과 함께 부정적 측면도 있다. 아래 보도는 현재 부가가치세를 극명하게 상징한다.

2008년 4월 KBS뉴스는 [1조원 가짜세금계산서 석유류상 적발]이란 제목으로 “석유제품을 불법으로 유통하고 1조원대 가짜 세금계산서를 발급해 세금을 탈루한 조직이 적발됐다. 이들은 주유업자들과 짜고 영수증을 주고받은 데다 가명과 대포폰까지 사용하면서 적발을 피해왔고 지난 2년 동안 1조 2천억원 어치의 가짜 영수증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또한 2008년 2월 조선일보는 [세법 허점 이용 국고 2조원 빼내. 금괴거래 부가세 내지 않아]라는 제목으로 “대기업 직원 금도매상 등이 변칙적인 금괴 수출입거래를 통해 2조원대의 세금을 포탈했다가 검찰에 적발됐다. SK상사와 LG상사 등 대기업이 금을 수출하면서 세법허점을 노려 범죄에 활용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조세포탈범죄로는 사상최대규모이다.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뺑뺑이 거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들의 벌금액수는 2조4천억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자료상 규모가 어떠한가? 아래의 통계자료에서 나오듯이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1만 1천 건을 조사하여 8천 1백명을 검찰에 고발하여 형사처벌을 했다.

※자료상 조사 실적(국세청 통계연보 발췌) [단위:건]


그리고 적발되지 않거나 부분자료상으로 확인된 내용을 감안할 때 자료상의 문제는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상황이다. 국세청에서는 지난 35년간 총력을 기울여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지만 통계에서 나타나듯 자료상은 줄지 않고 수법은 점점 교묘해지며, 금액은 대형화 되고 있다. 고발은 했지만 처벌은 중국과 달리 비교적 관대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건가? 이 책임은 국세청에 있는 것인가? 아니다. 무모한 입법이 빚은 참극인 것이다.

3. 나의 운명을 바꾼 부가가치세

부가가치세는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 대학 학비를 마련하려고 1977년 부가가치세 시행요원으로 국세청에 입사했고, 국세청에서 아내를 만났고, 아들을 교육시켰고, 세무전문가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험난했던 부가가치세 도입현장을 체험했고, 1988년도의 석사학위논문이 ‘부가가치세법 변천에 관한 고찰’이었고, 살벌한 자료상 조사를 수행했고, 2004년도에 부패방지위원회에 ‘부가가치세 개선 대책 보고서’를 제출했고 관련 저서에서도 이런 내용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국세청 국세심사위원으로서 자료상과 관련된 심사청구내용들을 많이 심리하였다.

우리나라의 납세자들뿐 아니라 정치인과 공무원들 또한 부가가치세의 역사적 진실을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도 전부를 안다고 책임 있게 이야기 할 형편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부가가치세의 역사흐름을 균형감 있게 알고, 또 많은 경험을 했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대안을 깊이 있게 토론하여야 한다. 이제 역사의 현장으로 가자.

4. 자료상을 예언한 선각자들…
석사논문 ‘부가가치세법 변천에 관한 고찰


위 논문은 은사 최명근 교수님이 주제를 정해 주셨고 1988년에 완성됐다. 전체 흐름은 그 분의 작품이고 단지 나는 자료를 수집하는 역할만을 했다. 그럼에도 2년간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재무부 세제실에서 12년간의 ‘부가가치세 연혁집’과 법령개정자료를 수집했고, 국회 도서관에서 관련 논문을 수집했고, 엄청난 양의 국회 ‘재경위’와 ‘본회의’의 속기록을 검색하고 읽었다. 속기록을 검색하는 것은 ‘한강에서 바늘 찾기’였다.

처음에는 부가가치세가 별도로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상당히 두꺼운 속기록에 단지 몇 줄 언급되어 있고, 어떤 것은 “첨부된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황당한 내용을 보고, 그 전문위원을 찾아가 첨부자료를 찾기도 했다.

그럼에도 12년간의 국회속기록을 검색하는 것은 언론에 나타나지 않는 커다란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소신ㆍ선견지명ㆍ통찰력이 있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을 속기록에서 발견했다.

1976년도 국회 속기록에서 진의종ㆍ이만섭 의원은 부가가치세 시행을 반대하면서 ‘자료상’ 출현을 예고하였던 내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논문이 통과되기는 했지만 너무도 힘들었기에 15년간 펼쳐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저술과 부패방지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그 논문을 본 순간 경탄 그 자체였다. 스승이 주연이고 나는 조연이었지만 그 논문내용에 거론되었던 사항들 중 많은 것들이 법령개정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5. 부가가치세 실시에 대한 찬성과 반대

가. 찬성 의견
다음은 부가세의 도입을 담당(당시 세제실 과장)했던 실무주역 前재경원 강만수 차관의 언론 인터뷰 내용이다.

부가세가 도입된 배경은. “부가세 도입은 74년 여름부터 `1백억달러 수출과 1천달러 소득'을 달성하기 위해 경공업에서 탈피, 중화학공업으로의 추진과 자주국방을 위한 독자적인 무기체계의 개발을 위한 재원조달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재정수요가 부족한 상황에서 세율을 올릴 경우 조세저항이 거셀 것을 우려한 나머지 탈세를 막고 소득·법인세의 기초가 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됐다.

영업세로는 재정조달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부가세에 대한 전문가가 거의 없었다. 전문가는 김종인 박사와 김재익씨(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부가세가 어떤 것인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각계각층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 반대쪽이었다. 경제계 뿐만 아니라 학계와 언론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특히 영세기업은 영수증을 주고받는 관행이 정착되지 않고 장부기장능력이 없는 등 부가세 계산이 어렵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부가세 도입과정의 에피소드는. “부가세 도입을 반대한 배후에는 영수증 주고받기와 과표 등 계산이 어렵다는 것보다 부가세를 도입하면 탈세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고, 지방 유지들까지도 정·관계에 로비를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한 의견은“국가 존립에 근간이 되는 조세 경찰 국방 등 3대 근간 중 조세제도상 문제가 있어 왔던 부가세제도가 바로잡아지면서 세무행정이 선진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어 조세행정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노력세수 비율이 낮을수록 선진국에 가까워지는 만큼 지금보다 더 노력세수 비율이 낮아지길 기대한다. 앞으로는 모든 시스템을 자진신고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세무조사를 수시로 하기보다는 한번 세무조사를 받으면 회사존립이 판가름될 정도로 강도높은 조사를 벌여 나가는 등 감시역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 반대의견 : 박정희 대통령도 부가가치세 폐지를 고려.
아래의 반대의견은 前 서울지방국세청장이자 재정학자인 이철성 교수의 저서에서 발표한 의견을 요약했다.

1979년 초 재무부 관리가 “부가가치세 제도를 도입한 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이 세제를 계속 존속시켜야 할 것인지, 폐지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연구논문을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교수는 “이 세법은 각계각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된 지 불과 1년 반밖에 안되었는 데 벌써부터 존폐론이 나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재무부 관리는 “박대통령은 경제과학심의회의 장관급 위원 전원을 전격해임하고 ‘중화학 공업을 계속 가동할 건지, 부가가치세를 계속 징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즉시 연구ㆍ검토하여 소신껏 보고해 달라. 일본도 대만도 못한 부가가치세는 막상 시작하기는 했지만 갈수록 民怨만 늘어 요즘 잠을 못잔다.’고 했다.”며, 연구 요청을 하였다.

이교수는 요청을 수락하고 국세청 담당자ㆍ세무사ㆍ기자ㆍ상인 등을 방문ㆍ면담하였고, 그 연구결과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부가가치세는 1976년 5월 세법 요강 발표, 9월 법안발의, 12월 국회 통과된 급조된 세금이었다.
2) 심의과정에서 장관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내용”이라고 하여 반대발언을 원천봉쇄했고, 찬반토론없이 경험 없는 재무부 및 청와대 관계자들에 의해 만들었다.
3)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소비세 종류의 단순화, 수출촉진, 기업의 투자의욕 고취였다.
4) 위의 명분은 허울 좋은 구실이었고, 속셈은 증세수단이었다. 최고 세율 13%까지 높은 세율로 물가를 자극하였다.
5) 부가가치세가 자동검증을 통한 근거과세라고 주장하나 무자료거래를 봉쇄할 방안이 없었고, 단속이 강화될 경우 세무마찰과 조세저항의 위험성이 높다
6) 부가가치세법은 전경련 및 정부ㆍ여당의 반발로 6개월 머뭇거리다 1977년 7월에 10%의 세율로 간신히 시행에 들어갔다.
7) 법대로 무한정 단속ㆍ처벌하자 상인ㆍ노점상ㆍ행상들까지 아우성쳤다. 상인들은 “세무서원들이 벌금과 징역 보내겠다는 협박을 처음 본다.”며 항의했다.
8) 1978년 10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의원들은 부가가치세 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고, 재무부 장관은 정중한 사과만을 할 뿐이었다.
9) 연구보고서 결론은 부가가치세법 폐지로 가닥을 잡았지만, 국제적인 망신과 야당의 ‘정권타도’ 구실을 제공할까봐 차선책으로 결론을 내렸다.
10) 그러나 이 보고서는 10.26 사건으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못했다.

다. 박정희 대통령 前청와대비서실장의 증언.
이철성 교수 저서에서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랜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씨의 부가가치세와 관련한 증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마도 우리 부가가치세 역사를 압축한 것이라고 보아아야 한다.

1) “부가가치세를 시행한지 2-3일이 지나자 금전등록기를 조작해주는 전문업자가 나타났다.”
2) “서울 시내 종합시장 상인들이 집단적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1977년 10. 13일 평화시장은 철시를 하였고,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에서는 세무서 방화사건이 있었다.”
3) 1979년 10월 25일 청와대 앞 안가에서 점심을 같이 한 김재규 정보부장은 “부마사태는 박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대한 직접 저항이 아니라 세금을 가혹하게 부과 처벌한데 대한 조세저항이 쌓여 도화선이 됐다.”고 말한다.
4) 가혹한 처벌규정을 마련한 재무부 실무자는 “자동검증장치가 잘 가동되면 세금의 90%가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5) “부가가치세의 졸속 도입과 가혹한 처벌, 성급한 시행으로 말미암아 민중봉기를 유발시켰다.”

6. 결론

서두에서 중국에선 부가가치세 자료상과 관련 세무공무원을 사형시키는 실상을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도 대기업까지 자료상에 관련이 있을 만큼 부가가치세는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지경이고, 국세청에선 자료상을 현행범으로 체포ㆍ처벌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이는 35년 前 세법의 문외한인 국회의원조차 ‘자료상 출현’을 예견했던 당연한 결과이다. 즉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제도를 무모하게 도입함으로써, 국민적인 저항을 받았고 이를 시행했던 대통령은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고, 이 제도는 현재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국민과 국회차원의 대책이 없다. 기껏해야 세율 인상ㆍ인하 또는 면세ㆍ과세에 대한 논란이 전부이다.

이제 부가가치세의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뚜렷한 대안도 없다. 세제를 폐지하기도, 다른 세제로의 전환도 쉽지 않다. 설령 다른 세제로 전환한다고 이 보다 좋다는 보장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정부의 강공책은 불상사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놔두는 것도 문제이고… 국민과 정치권ㆍ정부ㆍ전문가들이 충분한 토의를 하길 바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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