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새벽 5시35분께 삼성그룹의 실질적 오너이자 책임자인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 조치됐다. 지난달 19일 첫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노심초사하던 삼성으로서는 이 부회장의 구속이 결정되자 충격에 휩싸였다. 삼성 창립 79년 만에 총수가 구속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 됐다.
한달만에 구속여부를 두고 다시 심사하게 된 법원이 17시간의 장고 끝에 이날 구속영장을 발부하기까지는 국정농단의 실세인 최순실(61·구속기소) 측에 대한 자금 지원을 뇌물로 볼 정황이 충분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설마했던 삼성의 충격은 더 클 수 밖에 없다.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혐의는 뇌물 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위증) 등 5가지다. 함께 청구된 박상진 대외담당 사장의 영장은 기각됐다.
이 부회장 구속 여부를 심사한 서울중앙지법 한정석 영장전담 판사는 "새롭게 구성된 범죄혐의 사실과 추가로 수집된 증거자료 등을 종합할 때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라고 발부 사유를 밝혔다.
박영수 특검팀은 삼성 계열사가 최 씨 측 법인과 계약하거나 이들에 자금을 제공한 것은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대가라고 판단했다. 박 대통령이 합병 찬성을 지시했고, 이 부회장은 그 대가로 거액의 자금을 최 씨 측에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회삿돈을 끌어썼으므로 횡령도 있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특검의 이런 주장이 개연성이 있다고 보고 특검의 수사 방향에 힘을 실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이 부회장 구속으로 특검은 박 대통령과 최 씨 그리고 이 부회장 간에 얽혔던 뇌물 혐의 규명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으로 보고 수사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이달 28일 수사 기간 만료를 앞둔 특검은 이 부회장 신병 확보를 발판 삼아 수뢰 혐의를 받는 박 대통령 조사에 남은 역량을 쏟아부을 전망이다.
한편 연 매출 300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인 삼성그룹이 이날 총수인 이 부회장의 구속으로 방향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다.
눈앞에 산적한 경영 현안도 문제지만, 가장 큰 걱정은 그동안 시간을 두고 검토해왔던 경영혁신 작업, 사업구조 개편 및 투자, 인수합병(M&A) 등 이른바 그룹의 미래를 그리는 각종 난제의 표류다.
80억 달러에 사들이기로 한 미국의 전장 전문기업 하만(Harman) 사례와 같은 대규모 인수합병(M&A)이나 천문학적인 손실이 따르는 갤럭시노트7의 단종 결정 등 이 부회장이 빠진 삼성은 앞길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핵심 사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한 개 라인을 확장하려면 각각 10조원, 1조원 안팎이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시설투자에 집행한 비용은 27조원 이상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또 지난해 11월 이사회에서 공식화한 지주회사 전환 검토 작업도 탄력을 잃게 됐다. 애초 6개월 이내에 로드맵을 그린다는 계획이었으나 총수의 부재로 오는 5월 전에 밑그림이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 부회장의 구속 직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사업 개편 작업은 사실상 정지돼 '총수 유고' 사태를 맞은 셈이다.
당분간은 해체 예정인 미래전략실과 계열사 사장단 중심으로 경영을 꾸려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기가 정해진 CEO로서는 대규모 투자와 M&A를 추진하는 데 권한과 책임에 한계가 있어 최소한의 권한행사만 이뤄질 예정이다.
삼성 관계자는 "전문경영인들이 회사를 꾸려가겠지만, 삼성의 미래를 결정할 큰 결단은 미뤄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 부회장이 조속히 경영일선으로 복귀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법원이 17일 새벽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자 특검팀의 다음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는 SK·롯데·CJ·포스코 등 다른 대기업들도 잔뜩 긴장한 채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국과 재계의 움직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