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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분의 모범적(청백리)인 공직자 선배들을 생각하며
세분의 모범적(청백리)인 공직자 선배들을 생각하며
  • 日刊 NTN
  • 승인 2013.09.27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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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의 세짜이야기

 
얼마 전에 전임 국세청 청, 차장이 연루된 뇌물수수사건이 보도 되어 국세청 OB의 한사람으로 망연자실하고 부끄러웠다. 워낙 어렵고 유혹받는 국세청의엄무 성격과 또 그 많은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으니 가지 많은 나무처럼 바람 잘 날이 드문 것이 사실이다. 그 때마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개혁과 쇄신 노력을 다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또 다시 큰 사건이 발생하면, 그동안의 자정(自淨)의 성과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지은 집들처럼 한바탕 파도(사고)에 휩쓸려 가버리고 아무 것도 안 남는 듯하여 허탈한 마음이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국민, 그리고 공직자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세분의 선배들을 생각해 본다.
 

조선 초기의 황희(黃喜, 1363∼1452) 정승

우리의 비교적 가까운 역사,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가장 어질고 청렴결백한 공직자의 표상으로 떠오르고, 그 택호(宅號)가 그대로 정승으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고려(王 王朝)에 대한 지조를 지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가 결국 태종, 세종까지의 4대를 걸처 74년의 공직생활, 18년 동안 정승(국무총리급)을 역임하여 이미 여러가지 기록을 남긴 분이다. 두 사람이 다투는데 ‘니가 옳다, 너도 옳다. 둘다 옳다면 됩니까? 네말도 옳다’하던 서민풍의 정다운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이렇게 사사로운 일에서는 ‘시시(是是)’하였으나 공적으로는 임금 앞에서도 ‘비비(非非)’하였던 너그러우면서도 사리가 분명하고 유능하셨다고 한다. 이런 황희 정승은 정쟁이 심하고 좌천, 귀양 등이 다반사였던 조선시대에서 임금으로부터 저 아래 신분이 낮은 백성까지 신뢰와 존경을 한 몸으로 받았던 너무도 드문 존재였다. 정승이면서도 비가 오면 지붕이 샐 정도의 집에서 살았다니 좀 과장이 아닐까 싶지만 청렴한 생활을 신조로 하였으며 개인과 주변(측근)보다는 국민과 국가를 우선으로 바른 길을 걷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자세가 정승의 자리에 롱런한 비결이었으리라. 오늘날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시대를 뛰어넘어 그대로 이어받을 덕목이다.
 

건국 초기(초대, 2대 9년여)의 김병로(金炳魯1887∼1964)대법원장

가인(街人)김병로 님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법률교사, 판사로 1920년부터는 독립투사들의 변호사로 그리고 미군정 사법부장을 거처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대쪽같고 청렴한 법조인이자 민족지도자였다.
6.25의 상흔이 지워지지 않은 1950년대에 박봉을 참다 못한 판사들이 대법원장을 찾아와 호소하자 김 대법원장의 대답은 ‘나도 죽을 먹고 있소 조금만 참고 고생합시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행하는 것보다 수만배 명예롭지 않겠소’하였다고 한다. 또 사무실이 너무 추워 잉크병이 다 얼어서 판결문을 쓸수 없다는 판사들에게 “영하 5도가 되기 전까지 난방은 어림도 없는소리”라고 호통첬다는 실감하기 어려운 일화들이 전해온다.
일찍이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변론 등으로 일본 경찰의 눈에 가시였으며 독립후 친일파 처벌에 소극적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민족주의자의 신속한 처벌을 주장하고 1954년 장기집권 시나리오 였던 ‘사사오입’에 반대하는 등으로 사표를 강요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요”라고 버티면서,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의 전통을 확고히 한 분이다. 또한 대법원장을 퇴임한 후, 5·16을 전후한 시절에는 야당의 지도자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깨끗한 정치를 위하여 노력한 존경받는 거목이었다.
오늘날 우리 법조인, 행정부 공무원 뿐만 아니라 정치인 까지도 그 언행을 본 받아야 할 진정한 선배이셨다.


국졸로서 도백 ,국세청장을 역임한 김수학(金壽學, 1927∼2011)

국졸의 학력만으로 군청의 소사로 출발해 도지사(10년 동안 대구·충남·경북)까지 승진해 일찍이 입지전적인 신화를 남긴 청렴하고 능력있는 공직자의 표본이셨다. 직업공무원의 경력으로는 엉뚱하고 느닷없이 4대 국세청장(1978∼1982)으로 임명돼 참신하고 능력있는 행정으로 국세청의 새로운 이미지를 확립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때(1966년부터 12년 1∼3대)까지 의 군출신 국세청장들의 강성 이미지를 벗어나 사람좋은 동네 아저씨같은 서민적 분위기로 친절한 세무행정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 시기에 세무공무원들의 권위적이고 부정적인 인상들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으며 공정하고 합리적인 세금징수가 이뤄지도록 세정쇄신과 정화노력을 다했다. 오랜 동안의 공직생활 중에 30여번을 이사했는데 자신은 퇴근 후 주소를 들고 이사집을 찾아 다녔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공직수행에 전력을 기울인 이 시대의 대표적인 모범공무원이었던 것이다.
청백리(淸白吏) 보다는 모범공무원이라고 한것은 예전부터 청백리라고 불리던 공직자들이 비현실적이고 답답한 공무원이 많다는 인식 때문에 청렴하면서 일도 잘하던 황희정승, 김수학청장 등은 모범공무원으로 표현했다. 국세청장 퇴직후 고향(경주)으로 돌아가 명예읍장까지 맡아 화제가 됐으며 내무부 시절부터 진력해온 새마을 사업의 진두 지휘 등 여러 가지 활동을 계속하다가 재작년 작고하였다. 국세청 발족(1966년)이후 18명의 국세청장중 많은 분들이 박수를 받고 명예롭게 퇴임했지만 그 중에서 작고하신 분으로서 김수학 청장은 ‘윗물이 맑아야…’를 실천하고 자신의 이익과 안위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그리고 조직을 생각하는 공직자의 수범이셨으니 국세청 공무원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들이 기억하고 본받을 선배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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