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면서] 안용진 세무사
지난 일요일 서울의 군민회 임원들이 고향을 찾는 행사를 하였다. 네 대의 관광버스가 희뿌연 서울을 벗어나면서 마냥 들뜨기 시작하였다. 길옆 개나리며 벚꽃은 이미 꽃술을 흩날리며 남색 새싹에게 자리를 물러주고 있었다. 고속도로 주변의 산들은 온통 분홍치마 진달래로 치장하여 고향 찾는 길손들을 반기고 있었다. 두메산골 산 많기로 유명한 괴산이 이제 그 속살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엇다.
산 중턱을 가로질러 십 수개의 터널이며 교량으로 죽 뻗은 고속도로, 돈이 참으로 좋기는 좋다. 나라가 부자인데 그 주인인 우리들이 맘껏 즐기는 걸 누가 뭐라 하겠는가. 길디긴 새재 터널을 빠져나온 버스는 山水좋은 문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금방 우리의 고향 예천이다. 처음 찾을 곳은 용궁이다. 내 육신을 주었고, 키워주고, 오늘의 나를 만든 고향 용궁을 가는데 내 어이 흥분하지 않으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데 땅이름이 “龍宮” 이라면 나머지는 알만하지 않는가. 용궁속의 용궁, 낙동강의 지류 내성천이 한바탕 용 틀임 하는 “回龍” 이 오늘의 주 목적지이다.
가는 길목에 용궁향교가 있다. 향교가 있다는 것은 옛날 “고을”을 말한다. 지금은 예천군에 속한 面 이지만 원래 독립된 고을 이었다. 忠孝의 고장 예천사람으로 고향을 찾으면서 감히 향교를 그냥 지나치겠는가. 용궁향교는 조선 태조때(1398) 창건된 유서깊은 곳으로 봄 가을 두 번 지방 유림이 성현에게 제사(이를 석전대제라함)를 올리고 있다. 원래 향교는 학교와 제사의 기능을 겸하는 국가에서 건립한 기관으로 明倫堂은 학문을 연마하고 大聖殿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각설하고 김동대 회장을 비롯한 우리 일행 140여명은 대성전 앞에 도열하여 경건히 봉심(奉審)의 禮를 다하였다. 향교의 책임자 안종건 典校와 임원인 장의(掌儀)여러분의 안내와 차 대접에 감사를 드린다.
향교에서 지척인 회룡교를 건너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김수남 군수를 비롯한 지방유지 50여명이 우리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간단한 인사와 의식을 하는 동안 내 시선은 줄곧 외나무다리를 사이에 둔 강 건너 회룡포 마을에 있었다. 산행 입구에 세워진 김회장의 고조부가 지은 “龍州八景” 詩碑를 보며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용궁의 정경들을 생각해 보았다. 산자락에 듬성 듬성 서있는 아름드리 老松들, 속인의 눈에는 곧잘 돈으로 환산되는 군자풍의 토종 소나무, 그 몇그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고향에 오기를 잘하였다. 이윽고 길은 가팔라지고 저 아래 강물이 휘감고 있는 백사장 속의 촌락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을 몇 번 오기는 하였지만 이 코스는 처음이다. 절벽 산자락을 휘감고 도는 쪽빛 물굽이를 어찌 무딘 세속의 언어로 표현하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저 아래 어느 곳에 실 꾸러미 몇 개가 모자라는 깊은 소(沼)가 있었다고 하니 예가 진정 용궁임을 말하고 있음이렷다.
물굽이를 따라 희디흰 모래벌판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대 여섯의 집들이 고즈넉이 자리 잡은 그림 같은 촌락이 바로 육지 속의 섬 회룡포 마을이다. 최근 신문 잡지 TV에서 소개되어 이곳을 와 보지 않은 사람도 잘 알려진 곳이기는 하지만, 이토록 신비스런 장관을 직접 보는 것과 어찌 비하랴. 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회룡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용이 날아오른다는 飛龍山이다. 이윽고 숨이 가쁘고 땀이 막 나려는 지음 전망대에 올랐다. 몇 번이고 보아도 새롭고 신비로운 대 자연의 작품, 회룡포를 다시 찬찬히 뜯어본다. 이곳은 원래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영주를 적시고 다시 예천을 살찌우고 낙동의 본류로 들어가는 내성천의 끝 부분으로,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안동을 거치는 낙동강의 본류에 합치기 직전의 지점이다.
영주 예천 분지의 들판을 거느리고 유유히 흐르던 강물이 낙동강 큰 줄기를 지척에 두고 바로 앞을 가로 막는 비룡산과 한바탕 용호상박(龍虎相搏)을 치루면서 저렇게 장관을 연출하고 있나 보다. 그대 우리국기의 태극 문양을 아는가? 회룡포는 한 말로 태극마크이다. 태극은 우주만물의 근본 원리이다. 태초에 하늘이 이곳에 태극의 형상을 만든 것은 분명 깊은 뜻이 있으리라. 하회마을이 낙동강의 중간에 자리 잡은 큰 태극이라면 회룡포는 정밀하게 그려 물감을 칠한 작은 태극이다. 소백을 떠난 강물이 태백 큰 물줄기에 바로 합치는 것을 마다하고 비룡산을 부여잡고 한바탕 힘자랑하는 그 뱃심을 내 어이 알겠는가? 어느 호사가는 이곳 회룡포를 국토의 “배꼽”이라고 하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직접 보면 그 말이 風만이 아님을 알 것이다. 전망대 부근에는 신라 고찰 장안사가 있으며 산등성이를 조금 내려가면 옛 봉화대가 있고 더 내려가면 신라의 옛 원산성의 터가 있다. 신라 백제의 격전장이니 용궁이 지정학적으로 군사요충지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 성 아래가 유명한 천하명당 三江마을이다. 다시 말해 태백산, 소백산, 주흘산에서 발원한 세 줄기 강물이 합치는 곳이다.
전망대에서 다시 내려다본다. 꿈속에서 본 듯한 저 마을, 파란 나무와 은모래 백사장, 쪽빛 강물, 靑白의 태극마크 아스라하고, 실오라기처럼 외나무로 속세와 이어진 다리는 더더욱 가물가물하다. 산은 물을 껴안고 물은 산을 비키며 오고 감을 설워하니, 애라! 이곳이 피안(彼岸)이거늘 한잔 술 쉬어감이 어떠리!
마침 전망대 바로 아래 산등성이 조그만 광장에 고향사람들이 마련한 조촐한 정성이 고향 떠난 길손을 유혹하였다. 미나리 부추 부침이며 용궁 막걸리의 맛을 말해 무엇 하랴. 이내 얼굴은 불그레하고 한 마리 싯귀가 막 떠오르려는데 야물찬 강성남 사무국장의 호르라기가 흥을 깨고 말았다. 갈 길이 바쁘단다. 박대일 전회장이 뒤돌아 보며 못내 아쉬워하니 분명 무슨 사연 있으리.
하산길은 또 다른 맛이 있고 신록의 향긋함에 흠뿍 취하기도 하였다. 나무사이 북쪽으로 보일듯 말듯한 내 고향 마을을 찾으려다 풀뿌리에 넘어지기도 하였다. 하산이 끝난 지점에 전 군민회장 이두호 박사가 작년에 지은 “竺凡精舍”가 있었다. 축범은 그의 호이고 정사는 절집을 말하는데, 유교와 불교에 정통한 그로서 유불(儒彿)의 참삶에 남은 힘을 쏟는다하니 참으로 장한 일이다. 늦은 점심을 옛 향석초등학교 교실에서 푸짐하게 들었다. 상큼한 봄나물로 용궁의 새댁들이 정정스레 마련한 비빔밥이 정말 끝내 주었다. 거기에 탁베기 한사발 걸치고 풋고추 푹 찍으니 예가 용궁인가 서울인가. 갈길은 멀고 해는 서산을 향하니 서둘러야 한다. 세월이 좀 먹나 바빠도 볼것은 보아야 한다. 용문면 소재지의 노송군락과 잘 다듬어진 돌담길을 걸으며 ‘금당 맞질 반 서울’ 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다시 발길을 돌려 예천 미래의 상징 양수발전소의 공사현장을 찾았다. 8천억원의 공사비로 4-5년후면 공해없는 전기를 만들어 국가는 물론 예천의 발전과 번영을 약속하는 청사진을 보고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띄워본다. 백두대간의 중허리 저수재를 넘으니 해는 이미 꼴깍하였지만 저녁노을의 단양 山河도 또한 싱그러움의 그것이었다. 휴일 귀경길이 좀 막힌들 무슨 대수인가. 마시고, 떠들고, 웃고, 손벽치고, 어깨 들썩이며 형님 아우하니 예천사람 신바람의 끼가 발동하였나 보다. 어쨌든 오늘 하루가 비록 짧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향 예천으로 흐르는 강이 있음을 생생히 느끼는 보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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