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액 증가율 결정 뒤 분야별 증액 ‘점증주의’ 대신 꼭 필요한 예산소요 파악하는 ‘원점 편성’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해마다 몇 %씩 늘어나는 규모로 편성해 분야별로 조금씩 늘려가는 식의 ‘점증주의’ 방식으로 이듬해 예산을 편성해왔던 관행이 사라지는 대신 꼭 필요한 예산소요만 산출해 반영하는 이른 바 ‘원점편성(Zero Base programming)’이 정착할 것이라는 전문가 예측이 나왔다.
2021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세입이 대폭 줄어들 전망이 명확하지만 경제를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국가 입장에서는 재정을 더 풀 수 밖에 없으니, 정부 부처별로 가혹한 재정 혁신을 강요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온 예측이다.
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부소장은 최근 “법인세와 소득세는 물론 지방세인 재산세와 취득세도 줄어들 것이며, 국세 세수감소로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에 주는 지방교부세도 줄어들 게 확실한데, 쓸 일은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것”이라며 이 같이 주장했다.
이 부소장은 세입 감소에도 불구하고 재정지출 수요가 증가하는 이유를 “국민의 소득이 코로나19 경제 위기 이전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국가는 국민 가계와 개인의 경제적 위기를 책임져야 하고, 경제활동이 어려워 수입이 줄거나 없어진 국민들에게 대폭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소장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의 예산은 ‘점증주의’에 근거해 편성돼 왔다. 올해 예산보다 몇 퍼센트 더 늘어나는 규모로 편성, 분야별로 조금씩 늘려가는 식이 ‘점증주의’다. 이에 따라 한국 예산의 내용은 복지분야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빼면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게 이 부소장의 설명이다.
이 부소장은 그러나 “수입이 급격히 줄고 쓸 곳이 대폭 늘어나는 변화된 환경에서 내년 예산을 편성하기 위해서는 국가 채무와 지방자치단체 채무에 대한 관점부터 새롭게 바꾸는 등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3월24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2021년 예산안 편성지침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지침’을 각 부처에 배부했다. 내년 재정운용의 기본방향은 ‘재정의 적극적 역할’과 ‘재정건전성 기반마련’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현재의 예산 편성과 평가 기준으로는 새로운 재정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채 발행 규모와 용도가 제한돼 있는 데다 지방채 발행에 따른 채무비율 상승시 각종 재정 평가에서 불리한 평가를 받게 돼 있다.
이와 관련, 이 부소장은 “지방자치단체가 당장의 재정 수요를 충당할 수 있도록 지방채 발행의 자율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근본적인 관점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눈길을 끈다.
이 부소장은 “부처별 예산 편성도 ‘점증주의' 관행에서 벗어나 '원점편성'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면서 “기재부는 새로운 예산 편성 지침을 마련, 전 부처가 새로운 재정 수요를 찾아내고 국민 삶을 변화시키는 사업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올해 추경 과정에서 기재부는 부처에 가혹한 재정 혁신을 강요하고 있으며, 내년 예산은 이 재정 혁신의 기반 위에서 신규 예산을 가장 많이 편성하는 예산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노무현 정부 시절에 중기 재정의 전략적 운용을 위해 만든 국가재정전략회의를 본 궤도에 올려 실질적으로 운영, 국가 재정이 ‘국민 삶 향상을 위해 흘러가는 재정 구조’를 다시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왕재 부소장은 29일 본지 통화에서 ‘국민 삶 향상을 위해 흘러가는 재정 구조’와 관련, “정상적으로 고용보험에 가입해온 정규직 근로소득자가 직장을 그만두면 실업수당도 상대적으로 높게 받아 재취업때까지 생계 유지를 하는 등 사회보험 혜택을 누리는 반면 영세 소상공인들은 각종 사회보험 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계층이 많아 이들에게 적시적절하게 지원해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면 문제가 없지만 지금처럼 그렇지 못한 시기에는 자영업자들 대출 재원으로 사용하는 등 과감하게 국민 삶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투자 개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재량껏 운용할 수 있는 예산 중 ‘해외 출장 축소’와 같은 운영예산과 경기부양 효과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사업예산을 우선적으로 줄여 국가재난지원금 등의 재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옳다는 지적이다.
이 부소장은 “예산편성 후 예산을 가용예산, 예산편성에 앞서는 재량예산 개념인데, 인건비 건물유지비 등 고정경비를 제외한 사업예산 중 운영예산을 줄이고, 지자체가 관내 단체들에 지급하는 지방보조금(전체 예산의 1%)을 취약계층 지급 혹은 공공일자리 예산으로 전용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만 “전체적인 사업예산을 재검토 하되 대규모 사업을 무조건 미루거나 안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면서 “경기부양효과가 큰 투자성 사업예산을 건드리는 것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항공기 구매를 미루는 것은 바람직하고,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재생에너지 사업투자나 스마트시티, 바이오산업 등은 경기부양을 위한 녹색성장(Green New Deal)의 방향에 대체로 부합하는 것으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