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칼럼] 김진웅(NTN 논설위원)
1923년 한 섬마을에 석유회사 직원인 아버지와 요리강사인 어머니 사이에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영민한 어린이는 자라서 그 나라 최고 명문인 래플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캠브리지 법대 수석 졸업을 하면서 27세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 온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백여 개도 넘는 노동조합의 법률자문으로 활동하면서 우체부들의 파업사태를 성공적으로 변호하여 국민들의 머릿속에 법률계의 유망주로 강렬히 인식된다. 그 후 약관 35세에 영국으로부터 고국에 독립을 선사하고 자치정부를 만들어 초대 수상이 된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개방정책 아래 가난하고 작은 섬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서구적인 교역국가로 발전한다. 작은 도시국가를 아시아의 용으로 일으켜 세운 그는 다름아닌 싱가폴의 리콴유이다. 그는 1990년까지 무려 26년간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도 장관 고문(Minister Mentor)으로 지혜를 나누어 주고 있다. 그는 싱가폴의 리콴유가 아니라 리콴유의 싱가폴이다.
경륜가의 진단과 충고
지난 주에 그가 서울에 와서 강연을 하였다.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이 던져졌다. 한 청중이 물었다. ‘오늘의 싱가폴이 있기까지 귀하께서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인가요?’ 80대 노인이라고 보이지 않게 꼿꼿한 자세와 확신에 찬 눈으로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공용어를 영어로 정한 일입니다. 반대가 많았지요.” 국제사회를 향한 그의 개방정책을 그렇게 요약하여 주었다. 또 다른 질문들이 이어졌다. ‘한국에 좋은 말씀을 해주신다면?’ “TV를 보니 한국에서는 노조와 경찰이 마치 ‘스타워즈’ 영화처럼 싸웁디다. 갈등을 잘 극복하여야 합니다. 에너지를 그렇게 소모하지 말고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데 써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갈등 신드롬임을 간파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현명한 극복 시스템 구축을 주문하였다.
갈등과 혐오를 경계하라
그의 말대로 한국은 내부에서 서로 싸울 때가 아니라 그 에너지를 인도나 중국과 같이 무섭게 추격하는 이웃으로부터 살아남는 데 힘에 쏟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갈등을 유전인자로 타고 난 민족으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단일민족이 서로 분단 대치하고 각종 시위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졌고, 남쪽은 다시 남남갈등으로 갈라지고, 기업은 과격한 노사갈등으로 앓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화하면서 남녀갈등, 빈부갈등 등의 다양한 사회적 분화가 갈등으로 내연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이는 진화의 과정일 뿐이라고 믿지만.
그는 20년 뒤에는 지금 한국이 하고 있는 일을 중국이나 인도가 모두 대체하게 될 것이며, 장래 중국이 일본보다 5배는 큰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 새로이 도약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그가 우리에게 던진 키워드는 개방과 갈등의 해소이다. 깊이 음미해 볼 일이다.
IMF를 극복한 한국사회는 목하 일종의 외국 혐오(xenophobia) 후유증을 앓고 있다. 외국투자가들에 대한 적대감이 과민할 정도로 팽배하다. 이 것도 리콴유 전 총리가 지적하는 불필요한 갈등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여론은 외국투가가들을 사시(斜視)로 본다. 언론을 이들을 ‘대박꾼’, ‘먹튀’, ‘투기자본’이라고 거침없이 매도한다. 이런 분위기를 바라보면서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의 시민 입장에서는 심사가 그리 편치만은 않다. 이런 점을 경계하는 시각이 마른 하늘에 스치는 번개처럼 드물게 눈에 뛰기도 한다. 다음은 어느 일간지의 ‘기자의 눈’ (5월 22일자)에 실린 기사이다.
국가 세일즈 막는 反 外資정서
파리와 런던에서 국가설명회(IR)를 갖기 위해 21일 출국한 한덕수 경제부총리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유럽 투자자들에게 한국경제의 투자매력을 홍보해야 하는데, 지금 분위기론 무슨 말을 해도 세일즈가 먹혀 들어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현지 투자자들이 한 부총리에게 던질 질문은 뻔하다. “한국에서 외국펀드는 부도덕한 투기세력으로 취급된다면서요?” “조세조약 보다 국민정서가 앞서고 수 년 전 인수계약마저 무효화하라고 한다던데?” “한국기업들은 규제완화를 주장하다가도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얘기만 나오면 거꾸로 규제강화를 요구한다면서요?”
한 부총리가 할 수 있는 대답 역시 뻔하다. 한국정부는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는다, 적법한 투자이익은 반드시 보장한다, 개방기조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反)외국정서를 잘 알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겐, 어떤 설명이나 해명도 궁색하고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어느 나라든 자국기업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면 반대여론이 생긴다.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를 일본 Sony가 사갈 때도 그랬고, 영국의 Rover 자동차가 BMW에 넘어가고 첼시 축구구단이 러시아 석유재벌에 팔릴 때도 그랬다. 하지만 자존심 상하고 거부반응이 있더라도 우리처럼 전반적 반(反)외자정서로까지 번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진짜 개방된 나라와, 무늬만 개방된 나라의 차이다.
한국은 수출로 살아가는 나라다. 동북아 허브를 지양하고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앞장서는 나라다. 이런 나라라면 적어도 ‘투자하러 들어올 땐 박수를 치다가도 나갈 때면 돌팔매질하는’ 행태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이래 가지고는 백 번의 IR도 소용없다.
저작권자 © 日刊 NTN(일간NT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33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