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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짜이야기] 조선시대 3대 국난 치른 세 분의 왕들
[세짜이야기] 조선시대 3대 국난 치른 세 분의 왕들
  • 日刊 NTN
  • 승인 2014.12.0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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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회계법인 대표
(전 부산지방국세청장)

조선왕조 개국(1392년) 후, 큰 전쟁이 없이 평화 시대 200년을 지내다가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면서 수난과 혼돈의 세월이 시작 되었다.

곧이어 청(후금)나라의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침입(1627~1636)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래도 200여년을 버티다가, 19세기 후반 근대화시기를 놓치면서, 결국 일본의 강점(强占)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번의 국난(國難)시, 당시 왕들은 왕후가 아닌 비빈(妃嬪)의 소생들이었으며, 세자로 책봉되어 제왕 교육을 받은 준비된 왕이 아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1592-1597년)시대의 선조
연산군(조선10대 왕)이 폐출되고, 즉위한 중종(11대왕)의 9명의 아들 중 왕후 소생인 두 아들 인종(12대), 명종(13대)이 일찍 죽거나 왕자가 없었다. 결국 빈(嬪)의 소생 중 아홉째 아들의 자손(중종의 손자)으로 왕위에 오른 분이 14대 선조(1552~1608, 재위1567~1608)왕이다.

이때까지 왕은 모두 왕비(정실) 소생이었으나, 선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방계(傍系) 승계가 이루어져 이제 왕과 중전 중심의 외척(오너)정치에서 사림세력(전문가)이 중용되어 붕당정치(朋黨政治)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조 자신이 내심 희빈의 소생이라는 열등의식이 있어, 소신있는 정치를 하지 못한 면이 있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왜적들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신하들과 백성의 칭송과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 이를 질투하고 긴장한 것은 자신이 혹시 왕위에서 밀려 날 수도 있다는 피해의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선조는 당시 왜군이 침입해 올 것을 예상할 수도 있었으나, 당쟁으로 아무런 준비도 못하다가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니, 일방적으로 밀려서 서둘러 한양을 버리고 평양을 거처 의주까지 쫓기는 처참한 상황을 맞았다. 심지어 명나라 땅 요동으로 피신하여 국토와 신민을 버리려 했다는 것은 한없이 나약하고 역사의식이 없는 군왕으로 비판받을 수 있었다.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전국적인 의병봉기와 명나라 지원으로 간신히 나라의 명운을 지탱하였으나, 선조는 전후 수습에서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안타까운 역사였다. 더구나 첫 번째 왕후에게서 소생이 없어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함께 전쟁을 치렀음에도, 전후 두 번째 왕후(인목대비) 영창대군을 낳자(선조 54세), 이미 31세나 되었고 갖은 고생을 하며 전란에서 나름대로 공을 세운 광해군 대신 갓 태어난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한 것이다. 우여곡절로 15대 왕에 오른 광해군에게 진작 힘을 실어주지 못해 후유증이 크게 되었다.


병자호란 시의 인조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는 광해군과 늘 경쟁관계에 있던 선조의 또 다른 후궁, 인빈 김씨의 소생들 중 정원군의 아들(선조의 손자,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로 당시 불만세력이었던 서인들과 함께 반정을 주도하여 16대 왕위에 올랐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서모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반 인륜행위를 자행했고, 과도한 토목공사(전후복구 명분)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명나라를 무시하고 오랑케(후금-청나라)와 양다리 외교로 국가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을 들었지만, 역사는 승자(勝者)의 편인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의 현실적인 중립외교를 버리고 친명사대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청나라의 두차례(1627 정묘호란, 1636 병자호란) 칩입으로 철저하게 국토를 유린당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버텼지만, 결국 엄동설한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나라와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 등 두 왕자를 청에 볼모로 보내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인조는 광해군을 밀어낸 반정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군사력으로 척화(斥和) 주전론(主戰論)을 내세워 한민족 역사에서 처음으로 치욕적인 처지로 떨어진 것이다. 그 후 나름대로 현명하면서도 실리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소현세자의 독살을 묵인 하는 등 전후수습도 전혀 못한 채 회한과 고통으로 왕위를 지키다 죽었다.


국모 암살과 일제강점 시의 고종
조선왕조는 45년(1592∼1637년)동안 남·북쪽으로부터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으로 전 국토는 물론 수 천년 이어져 온 문화유산과 힘없는 백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유린당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는 그후 200여년을 끈질지게 존속하여 1863년 26대 고종(1852~1919, 재위1863~1867)이 즉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잠깐의 왕조중흥을 도모했던 영·정조시대(21, 22대왕1724~1800)를 지나, 60여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23, 24, 25대 순조·헌종·철종시기) 겪으며 근대화 시기를 놓친 것이다.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쇠락한 왕족으로 은인자중 기회를 노리던 이하응(1820~1898. 영조의 증손 남연군의 아들)이 왕실의 어른이었던  헌종의 모후 조대비와 은밀히 손을 잡고 11세인 아들을 왕(고종)으로 즉위시켰다.

어린 고종을 대리한 대원군은 나름대로 국정을 쇄신하고 근대화를 도모하려 했으나 이미 깊숙이 조선 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외세들, 특히 중·일·러시아 그리고 심사숙고하여 간택한 왕후 민비와 권력다툼으로 조선왕조 운명은 먹구름이 끼어만 갔다.

종국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 민비를 제거하기위해 일본 낭인패를 사주, 한 나라의 국모를 암살하기에 이르렀고 고립무원의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俄館播遷)하는 등 파국으로 치달았다.

별안간 왕위에 오른 고종은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서 주관을 가질 수 없었고, 외세에 따라 흔들이는 조정에서 갈등과 좌절을 겪는 실질적(27대 순종은 명목상 왕제)인 마지막 왕으로 일제강점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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