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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짜이야기] 꼭 100년 전 1915년의 세계, 그리고 그때의 인물들
[세짜이야기] 꼭 100년 전 1915년의 세계, 그리고 그때의 인물들
  • 日刊 NTN
  • 승인 2015.03.2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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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

세일회계법인 대표
(전 부산지방국세청장)

지난 번 3·1절 96주년을 보내며 지금부터 100년 전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상이 어떠했나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꼭 100년 전 1915년은 바로 1914년에 발칸반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쓰러트린 한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그 전쟁이 1918년에 끝나면서 당시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우리나라에서 3·1 만세운동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지 21년 후에,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여 다시 인류에게 미증유의 전쟁 상황으로 이어졌으며 이 전쟁 끝에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바로 100년전 부터 30년 동안은 세계 1, 2차 대전의 시기였으며, 그 전쟁들이 우리나라의 운명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100년전 세계의 정세와 우리나라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당시의 인물들을 살펴본다.


유럽의 1915년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소용돌이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체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처참한 전쟁마당이 되어 있을 때 전쟁 당사자국의 중심 국가 영국에서는 처칠(1874-1964)이 이미 해군장관으로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처칠은 1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그 연장선상에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 수상으로 전쟁의 승리와 전후 처리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국은 어떠했나? 유럽의 1차 세계대전을 관망하며 전쟁물자 등을 공급하고 있었으나 결국 미국의 윌슨 대통령(재임 1913-1920)의 주도로 1917년 참전하게 되는데 처칠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의 주역이 되는 루즈벨트(1882-1945) 대통령도 1차대전에서는 해군차관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1950-1953) 초기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1880-1965)는 원래 뼈대있는 군인집안 출신으로 미국 육사 4년 내내 98점 이상으로 수석 졸업한 엘리트 군인이었다. 그는 이 당시 미국의 참전과 함께 유럽에 파견된 무지개부대(42사단)의 참모장(대령)을 맡고 있었다. 맥아더와 여러 가지 인연을 가지면서 차후 한국전쟁을 마무리하게 되는 아이젠하워(1890-1964, 재임 1953-1960) 대통령이 바로 1915년에 육사를 졸업(성적 132등)하였다.

1, 2차 대전에서 독일을 상대한 연합국 측이었던 소련의 스탈린(1878-1953)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까지는 시베리아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의 동맹국가의 주축이었던 독일의 히틀러(1889-1945) 총통은 1차 대전 발발시 26세의 청년으로 보병연대에서 부상을 당하고 조국의 패전 등 비참한 상황을 체험하였으며, 종전 후 나치당을 만들어 2차 세계대전으로 몰고 갔다. 그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핵폭탄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이론이 발표된 것도 1915년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강자로 등장하고 중국 역사의 인물들

중국은 1911년 손문 등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출범하고 1915년에는 원세계가 황제로 취임하는 등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 노일전쟁에 연이어 승리하면서 아시아의 강자로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또한 허약해진 중화민국에 대해 1915년에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요구사항 21개항을 강요하여 차후 중국을 잠식할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국대륙의 운명을 좌우한 장개석(1887-1975)은 20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신해혁명시 손문의 신임을 받으며 혁명에 참여하여 군인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상대였던 모택동(1893-1976)은 후난성에서 사병으로 신해혁명을 체험하였으며 유난했던 학구열로 후난성 제일사범학교를 졸업(1918년)한 후 베이징대학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현재의 중국이 있기까지 모택동과 함께 삼인방이라 할 주은래(1898-1976)는 1915년 당시 천진에서 중등학교를, 등소평(1904-1997)은 고향 사천성의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1920년에는 당시 유행이라 할 수 있던 프랑스 유학을 함께 갔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하에서, 그 후 우리 역사의 인물들은

이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1910년)이후, 초대 육군대장 출신 총독의 무단정치로, 전통문화 및 민족정기가 말살되고, 전국 토지조사로 경제수탈이 시작되는 인고의 시기였다.

몇 년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 영향으로 1919년 3·1 만세운동과 함께, 상해의 임시정부 수립시까지 동토(凍土)의 한반도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우리 역사의 주인공들을 본다면 이승만(1875-1965)은 감옥생활 후 미국 유학(프린스톤대학 박사)을 마치고 하와이에서 교육·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후 해방(1945년) 그리고 민족분단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북한의 김일성(1912-1994)은 100년 전, 겨우 4살의 어린이였고, 우리 대한민국이 민족 상잔의 폐허에서,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룬 소위 박정이(朴, 鄭, 李) 삼인방, 박정희(1917-1979) 대통령, 정주영(1915-2001) 회장, 이병철(1910-1987) 회장이 이때를 전후해 태어났다.

100년 전 아시아 변방에서 일본에 강점된 식민지 국가로 이름도 모르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이 시기 세계 역사에서 30년 후(1945년)에 그 운명(해방)이 결정되었으며 그로 부터 70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거치고도 오늘날 세계 7번째로 5.3클럽(인구 5천만으로 국민소득 3만불)으로 발돋움하였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또 다른 10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의 나라가 될 것인가는 정치인들의 각성 분발과 함께 우리 모두의 생각과 행동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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