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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짜이야기] 65주년을 맞이하는 6.25 한국전쟁의 세(3) 당사자
[세짜이야기] 65주년을 맞이하는 6.25 한국전쟁의 세(3) 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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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6.1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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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

세일회계법인 대표
(전 부산지방국세청장)

6.25의 세 당사국은 한국, 미국, 소련

우리나라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어느덧 65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 전쟁은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가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서, 주변 열강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왔기에 단순히 우리나라 남, 북한의 내전이 아니고 국제적인 성격의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 종료시 엉뚱하게 한반도가 38선으로 분단,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진주하여 양쪽에서 정부수립이 추진되었고, 1948년 8월 15일 우리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독립)된 이래 채 2년이 안 돼 전쟁이 터진 것이다.

불시에 침략을 당한 대한민국에 다행히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이 신속히 파병되어 우리 국군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6.25 전쟁의 주역은 그 역할에 따라 한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 이렇게 세 나라였으며, 여기에 북한(김일성)과 중국(모택동)이 그 다음 당사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을 구했다.

1950년 6월 25일(미국 현지시간 6월 24일 토요일 저녁),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국무장관인 에치슨으로부터 한국의 38선 전역에서 공산군이 남침하였다는 전화보고를 받았다. 이때 그의 첫 반응이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XX들(Sons of the bitches)을 막아야 한다"고 소리쳤다고 하는데, 그가 화가 나서 외친 그 한마디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트루먼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1882-1945. 재임1929-1945)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이어 받은 미국 33대 대통령(1884-1972. 재임1945-1953)으로서 자유민주주의에 관한 순박한 이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 유럽에 NATO 창설 등 세계사의 중요한 결정을 많이 하였음에도 전임자의 큰 그림자에 가려져 크게 두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2차대전 전승국의 하나인 소련이 전후 공산주의를 확대하는 냉전체제에 강력히 대처하여 왔는데, 6.25전쟁도 스탈린이 주도한 것이라고 판단, 결코 밀릴 수 없다는 개인적인 라이벌 의식도 곁들여져 이렇게 일갈하였다고 평가된다.

당시 에치슨 국무장관은 대학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트루만 대통령과 달리 하버드를 나온 정통 엘리트 관료 출신인데, 그 해 1월 미국의 태평양 최후의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소위 에치슨 라인을 발표한 바 있으므로 한국전쟁에 대한 유보적인 대책을 제안할 수도 있었으나 대통령의 강경한 반응에 밀려 그대로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는 등 신속한 조치가 이뤄진 것이다.

그래서 6월 28일 유엔은 처음으로 자체 연합군(유엔군)을 조직하게 되었으며, 6월 29일에는 초대 유엔군사령관으로 예상되는 맥아더장군이 이승만대통령과 수원에서 회담하고 한국 전선을 시찰하는 등 참전 준비가 신속히 이뤄졌다.



소련의 스탈린은 세계 공산화 전략으로 북한을 조정, 전쟁 지휘

소련의 스탈린(1878-1953, 1924이후 권력자)은 2차 대전의 주역으로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과 함께 얄타회담, 포츠담 선언 등에 참여, 특히 한반도와 일본에 관련한 전후 처리에 깊이 관여했다.

전 세계 공산진영의 종주국으로서 한반도를 분단하여 공산화에 성공한 소련은 북한 괴뢰정부를 전적으로 관리하다가 1949년 모택동의 중국 내전 승리, 미군의 남한에서의 철수, 1950년 에치슨 라인 발표 등 유리한 국제정세를 보면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고 군장비 등을 적극 지원했다.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창설, 파견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국이 적극 참전한다면 차후 중국과의 충돌로 희생이 적지 않을 것이며, 아시아에서 미국이 주력하고 있을 때  소련이 유럽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장기적인 예측과 전략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스탈린의 세계전략에서 북한 김일성은 장기(將棋)판의 ‘졸(卒)’에 불과하고, 그 주적(主敵)인 미국의 트루먼에 대해서는 바둑의 ‘꽃놀이패’처럼 상황에 따라 대처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을 계기로 한반도 통일 열망

북한의 남침에 대비가 형편없었던 우리나라는 3일 만에 서울이 점령(6월 28일)당하는 상황을 맞았다. 국민들을 오도(誤導)하며, 위기관리 능력이 전무했던 대통령과 정부는 서둘러 피난(6월 27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사전예고 없이 한강철교를 폭파(6월 28일)하여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을 적의 치하에 방치하는 등 큰 후유증을 남겼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은 6월 25일, 당시 주한 미국 대사 무초를 만나 미국의 참전과 무기와 실탄 등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북한의 남침을 1914년의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 발생지)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과 비유하여 이 전쟁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을 쓸어버리고, 한국 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 대통령의 예상대로 전쟁은 미국을 필두로 한 16개국의 자유진영국가들의 유엔군과 소련과 협의한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초기 1년여의 전쟁 이후, 2년여는 일진일퇴의 소강전으로 진행되어 결국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 되었다. 200만에 가까운 군민(軍民)들의 전사상(戰死傷), 1000만의 이산가족, 국토, 경제의 황폐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른 우리의 입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정전을 강력히 반대했다. 어쩔수 없는 정전과 함께 우리(이승만 대통령)의 주장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1953.10.1)되어 62년 동안 안보, 경제발전의 토대가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는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참혹한 전란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나라의 안보를 튼튼히 한 대통령으로 기억하는 것이 6월 25일, 65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소회(所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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