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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짜이야기] 광복 70주년 8월 15일, 그날이 좀 빨랐거나 늦었다면!
[세짜이야기] 광복 70주년 8월 15일, 그날이 좀 빨랐거나 늦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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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8.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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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 
세일회계법인 대표 (전 부산지방국세청장)

2차 세계대전 당사자 3국(미국, 일본, 소련)에 의한 70년 전의 역사

금년은 광복 70주년으로 더 크게 경축하며 많은 행사와 함께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그 70주년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어떻게 그 광복을 맞이 하였었나를 새삼 생각해 본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은 종료됐지만,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전쟁(1941.12.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은 미국이 원자폭탄 두 발(1945.8.6. 히로시마, 8.9. 나가사키)을 투하하고서야 8월 15일에 종전되었다.

그런데 이때 패전국인 일본은 북방의 몇 개의 섬을 소련이 차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본토는 멀쩡했고, 오히려 35년 동안 일본에 강점되었던 우리나라가 3.8선(1953년 이후는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이 분단되어 70년에 이르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역사인가?

그것은 우리가 해방에 아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우리나라의 운명은 이들 전쟁 당사국 미국, 소련 등의 전후 처리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국 미국의 일본과의 마무리 전쟁과 소련 공산주의 팽창이라는 세계정세가 우리나라에 불운하게 전개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태평양 전쟁이 빨리 종전되어 7월 정도에 해방이 되었더라면 소련은 참전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고, 아예 전쟁이 더 지연돼 9월 이후 해방이 되었다면, 여유 있는 전후 처리로 우리 한반도와 일본은 다른 역사로 전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새 대통령 취임, 오키나와 전투 이후, 결국 원자탄으로 종전

2차 세계대전 마무리 과정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급서(1945.4.12)하고,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스탈린의 소련을 견제하는 등 분위기가 급변했고, 태평양전쟁 마지막 단계, 오키나와 점령이 예상보다 장기전이 되어 전력 손실이 적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는 유럽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필적할 만한 규모(7개 사단, 18만 명, 함재기 1500대 등)로 진행됐다. 그것은 일본군의 땅굴, 옥쇄(玉碎)작전으로 두 달 반(4월-6월)이 소요되었는데,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많은 5만명(중장인 사령관을 포함)에 이르는 사상자(일본은 군민 합쳐 16만명)를 낸 엄청난 전투를 치렀다.

미군은 가을 이후로 예상된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월등한 전력으로도 일본 군민의 옥쇄 의지를 극복하는데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고 예상하였다. 또 빠른 속도로 만주 등 중국 북부에서 진격해 오는 소련이 선전포고하기 전에, 미국이 독자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발 빠른 전략으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였다.

당시 극비의 맨하탄 계획으로 준비된 원자폭탄(7월 핵실험 성공)을 8월 6일과 9일 일본 본토 두 개 도시에 투하하였는데, 30여 만명의 사상자와 도시가 초토화하는 등 인류역사상 초유의 위력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미국의 두 번째 원폭투하 하루 전인 8월 8일 약삭빠르게 대일 선전포고를 하여 극적으로 전후처리에 개입하게 되었다.


한반도 남쪽을 구하기(?) 위한 3.8선 설정

원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처리방안을 논의한 1943년 11월 카이로 정상(미·영·중)회담에서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이지만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처서 이뤄진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잠정적인 국제적 신탁통치로 해석됐으며, 그 후 전쟁 막바지의 포츠담선언(1945.7.)에서도 일본의 항복 요구와 마무리 전투, 미·소간 전후처리 방향을 선언하였다.

그 동안 유럽과 전쟁에 매달려 있던 소련이 독일의 항복 이후에는 동북아시아에 치중, 7월부터 일본의 관동군을 대적하면서 질풍노도로 남하하여 공식적 선전포고 직후인 8월 9일에는 이미 북한에 진주하여 8월 16일에는 원산까지 진출하였다. 이런 소련의 빠른 움직임에 다급했던 미국은 한반도에 3.8선을 경계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점령통치 구역을 나누기로 제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8.15일에 합의 되어 70년 동안의 분단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의 병력은 600마일(약1000㎞) 정도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에 있었으므로 소련이 욕심을 내서 남한지역까지 점령할 수도 있었으나, 이외로 3.8선으로 합의한 것은 일본 북방의 섬들을 차지하는 등 전후처리에서 반대급부를 원했고, 또 한편 원자폭탄을 실전에 활용하는 미국의 힘을 겁냈다는 해석도 있다.


준비되지 않은 해방, 일본, 북한보다 어려웠던 그 후

일본 전범들, 특히 강경파들은 오키나와 패전 이후에도 일본열도 사수를 외치다가 원자폭탄의 참상을 보고, 더구나 소련의 선전포고에 전의를 상실하여, 8월 11일 항복의사를 확정하였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일왕이 8.15일 항복을 선언하였는데, 바로 이날이 우리나라에게는 가장 부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온 해방이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일이었지만, 많은 지도층 인사는 이렇게 갑자기 올 줄 몰랐던 준비되지 않은 해방이라고 하였다.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주석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고 당황하였고, 민족지도자 함석헌씨는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하였으며,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박헌영도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고 했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는 일제에 쫓겨, 해방 당시 충칭에서 어렵게 존립하면서 한국광복군을 유지했는데, 마침 미국의 정보기관 OSS(美 CIA 전신)와 합동 훈련(3개월)을 하면서 해방 전에 이들과 함께 고국으로 전격, 금의환향을 준비하던 중, 너무도 빨리 온 해방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후에 민간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 때까지 임시정부를 표방하는 여러 단체들이 난립(미국, 만주, 국내 등)하는 바람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해서, 해방 후에 미군정을 상대로 나라를 대표하는 당사자가 없었던 것이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왕(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일본은 전후처리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한 것이 우리와 대비된다. 심지어 북한의 경우도 대일투쟁의 지도자(?)였다고 알려진 김일성이 소련경내(하바로프스크)로 피신(1941년)한 것을 소련이 보호하였다가 북한에 괴뢰 정부 수립에 앞장세우는 등, 나름대로 일사분란하게 군정통치를 해 나갔다.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는 전범처리, 군과 재벌을 해체 등을 추진하였으나 일본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일급전범(一級戰犯)인 천황(天制)을 고수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전후복구와 국가부흥을 지원함에 있어서도, 전후에 소련의 공산주의 확대를 막는 교두보로서 일본의 존재감이 반영된 것은 일본의 행운이었다.

우리는 해방 후 극심한 혼란을 힘겹게 극복해 가면서, 3년 후 남한 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독립(1948년)했지만, 다시 그 2년 후 남북 분단의 상처가 터져 나온 한국전쟁(1950-1953)을 치르는 역사로 이어졌다. 일본은 이를 활용하여 전후복구 단계를 넘어 경제부흥의 밑천을 장만한 것도 저들의 거듭된 행운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준비된 통일로 지난 70년을 청산

70년 전 ‘해방의 날이 빨리 또는 늦게 왔다’면 하는 가정(假定)의 역사는 소용없고, 이젠 우리도 분단의 아픔을 딛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북한의 대치상태는 여전하고, 특히 북한은 분단을 초래한 간접 원인이기도 한, 핵개발에 올인하고 있어, 전 세계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되고 있다.

70년 전, 미·소(러시아)·일본에 의해서 이뤄진 우리의 분단상태가 이젠 양 당사자의 의지로 풀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미국과 힘이 커진 중국의 이해와 후원 아래, 한반도의 기적, 통일 대박을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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