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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의 세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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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간NTN
  • 승인 2016.06.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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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美 해병1사단의 승리, 악전고투, 그리고 후퇴
김 종 상

▶미국의 해병1사단의 전투 상황으로 본 6·25 전쟁

한국전쟁의 66주년을 맞이하면서, 당시 참전한 유엔군 16개국 중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막강한 전투력으로 유명했던 부대인 미 해병1사단의 전황은 그 자체가 한국전쟁이 아닐까 싶다.

미 해병1사단은 미국독립과 더불어 창설된 부대로 가까운 역사로는 제2차 세계대전시 태평양 전쟁의 그 치열한 과달카날(사단기의 명칭이 됨), 사이판, 오키나와 등 전투에서 늘 앞장서서 전공을 세웠으며, 한국전쟁에서 승리와 함께 처절한 전쟁을 치렀다.

▶인천상륙작전(1950.9.15.)의 주력 부대로 찬란한 승리를!

한국전쟁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유엔군 사령관),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인데 거기에 상륙작전이라면 전매특허였던 미 해병1사단이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당시 여러 가지로 유명했던 맥아더 장군은 전쟁이 발발하고 4일 후인 1950년 6월 29일 한국전황을 시찰하면서 상대방의 의표를 찌를 상륙지점으로 인천을 의중에 두었다고 한다.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7미터가 넘는 곳으로 정상적으로는 상륙작전을 추진하기에는 최악의 지형이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미 국방부 등을 설득하고 치밀한 양동작전(군산, 원산 등으로 위장)으로 멋지게 성공했다. 미 해병1사단과 우리 해병부대가 해안의 월미도를 선점하고 맥아더 장군은 그 유명한 선글라스와 8각형의 원수 모자를 쓰고 상륙작전을 지휘하여 당시 낙동강에서 대치하며 풍전등화와 같던 우리나라의 전황을 일시에 반전시켰던 것이다.

인천이 고향인 필자에게 월미도(이젠 육지)는 바다를 바라보는 나들이 코스, 맥아더 동상(1957년 건립)이 있는 자유공원은 뒷마당처럼 친근하다.

▶중공군과의 장진호에서의 처절한 전투

그 후 9월 28일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10월 1일(국군의 날이 됨) 돌파하여 평양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가는 신나는 전황으로 이어졌다. 그 시점에서 미 해병1사단은 다시 동해안 원산에 상륙하여 10군단 소속으로 동부전선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때 중공군의 참전이 이루어져 한국전쟁은 장기전의 양상으로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원래 중국대륙의 내전을 승리하고 건국(1949년 10월 1일)한지 꼭 1년 밖에 안 된 중공의 참전여부와 참전시의 병력규모에 대해 크게 오판하였던 맥아더 장군은 개마고원 근처 장진호 전투에서부터 전황을 그르쳤다.

동부전선의 주력부대로서 북한의 임시 수도 강계를 목표로 장진호 근처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던 미 해병1사단은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엄동설한(호수가라서 밤에는 -32도까지)에 떨면서도, 보이지 않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중공군 6개 사단 6만명(서부전선까지는 총 30만명 참전)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였다.

미 해병1사단으로서는 사단역사에 남을 기록으로 2차 세계대전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전투였다. 전사자 3600여명, 비전투 사상자(동상, 아사자 등)는 이보다 많은 처절한 사투를 벌이면서 전멸의 위기를 면하고 간신히 흥남으로의 퇴각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소위 인해전술로 나온 중공군(사상자 5만여명 추산)을 상대로 많은 희생을 치르며 중공군의 남하를 2주 이상 지연시켰다는 평가(미국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기념비는 이 전투를 모티브)도 있지만 맥아더 장군의 ‘추수감사절(나중에는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라는 호언장담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휴우증을 남겼다.

▶흥남철수작전 그리고 1.4후퇴

이렇게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 동부전선의 한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미 해병1사단 포함) 병력은 흥남으로 집결하여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각종 선박 195척으로 그 유명한 ‘군 10만명, 민간인 10만명 흥남 철수작전’을 벌였다.

몇 년 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로도 잘 알려진 그 흥남 철수과정에서 김백일 1군단장,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이 알몬드 10군단장을 설득하여 마지막 배(상선) 빅토리아호에 피난민들을 태우기로 결정하였다. 그 선장의 결단으로 군수품을 버리고 승선시킨 14,000여명의 피난민이 흥남을 떠나 부산(차후 거제도)으로 향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 배에 태운 최대의 인원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고 3일 동안의 어려운 항해 중에 태어난 5명의 새 생명도 큰 화제가 되었다.

▶6·25, 인천, 장진호, 흥남 이후에는

한국전쟁의 주인공, 독선적이던 맥아더 장군(당시 71세)은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의 불화로 1951년 보직해임됐고, 귀국하여 ‘노병은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를 남겼다. 뉴욕의 700만명(현재까지 기록)의 시민들의 환호 속에 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미 해병1사단은 1955년 해외 원정여단만 오키나와에 남기고 본국(미들턴)으로 귀환했으며, 위난시에는 언제라도, 20만명을 끌고 한국으로 오겠다고 하였다.

이제 핵무기까지 갖춘 북한에 재래식 전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겠으나, 든든한 우방의 다정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된다’가 우리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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