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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의 세짜이야기
김종상의 세짜이야기
  • 김종상 논설위원
  • 승인 2016.08.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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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1주년, 왜 우리가 분단됐을까?
그들 탓? 일본 탓? 우리 탓?
김 종 상

광복절(1945.8.15)을 맞이할 때마다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 한반도를 강점하고 중국 침략,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의 대가(분단 등)를 치르지 않고 엉뚱하게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을 상기하게 된다. 통탄스러운 역사의 현실은 당시 우리 한국은 국가로서 주체성도 약하고 힘(국력)도 없는, 흔한 표현으로 만만하였기에 국토 분단이 되기에 이르렀으며 지금까지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핵전쟁(核戰爭)의 가장 위험한 대치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들(미국, 소련) 탓-한반도의 지정학 상 이해관계

세계 2차 대전의 연합국으로서 미·영·중·소 4대국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전쟁 종료 이후, 한국도 자유로운 국가가 될 것이지만,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쳐서 이뤄진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잠정적인 국제적 신탁통치로 해석되었다.

그 후 유럽의 전쟁이 1945년 5월 8일 베를린에서 독일이 끝내 항복한 이후, 미·영·소 정상들은 포츠담선언(1945년 7월)에서 일본의 항복요구와 함께 한국 등 식민지 국가들의 신탁통치방안 등 전후 처리 방침을 재확인한 것이 한반도의 38선 분단으로 귀결된 것이다.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의 마무리는 결국 미·소 두 나라에게 맡겨졌는데, 소련은 유럽에서 베를린과 동독의 분할에 성공하고, 마지막 여력을 동북아시아로 돌려서 38선 이북의 북한을 진주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의 태평양전쟁(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이후)의 막바지 이오지마전투(1945년 2~3월), 오키나와전투(1945년 4~6월)에서 일본의 옥쇄(玉碎) 작전 등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전투로 발이 묶였다. 이 바람에 소련이 김일성을 앞세워 8월초에 북한에 진주하는 것보다 한 달 이후 남한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한반도에 38선(북위 38도)을 경계로 점령통치 구역을 나누기로 제안한 것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소련은 오매불망 바라던 태평양을 향한 부동항 등 전후의 성과를 얻은 것이고, 미국은 일본과의 전후처리에 차질을 빚어 38선을 경계로 소련의 진출을 막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일본 탓-한반도 강점, 침략 야욕 그리고 늦은 항복

섬나라 일본은 청일전쟁(1895년), 노일전쟁(1905년), 한반도의 강점(1910년) 등 승전을 거두면서 세계의 열강으로 등장하였다. 그 후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1941년)을 벌인 것 등이 한반도 분단의 원인(遠因)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원인(原因)은 2차 대전이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중국(대륙) 방면을 포기하며 100만명에 이르던 정예 관동군의 상당 부분을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에 투입하였고, 이로써 소련이 큰 전투 없이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한반도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반면에 미국과의 마지막 중요한 전투에서 시간(5개월)과 전력(戰力)을 소진(消盡)하게 하여 미국은 결국 일본 본토의 점령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당시 막 개발이 완료된 원자탄을 투하하여 항복을 받아 내기에 이른 것이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지만,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사흘 뒤 두 번째 원폭투하(8월 9일 나가사키)가 있고 나서 8월 11일에야 항복 의사를 밝혔다. 소련은 절묘하게 그 사이를 비집고 8월 8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본과의 전쟁 당사자로 전후처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 탓-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임시정부와 독립의지 부족

일본에 강점된 이후 9년 후인 1919년 3·1독립운동, 중국에서의 임시정부(시작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이었지만, 일본군의 훼방과 중일전쟁이 심화되어 계속 이동하였다. 항저우를 시작으로,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쓰촨 등을 거처 충칭까지 이동하며 고전하였지만 독립운동의 노선 등을 둘러싸고 이념과 입장을 달리하는 여러 단체들이 미국, 중국 등 여러 지역에서 난립하여 열강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더구나 신탁통치 같은 중요한 대목에서 우리 민족의 주체성, 정통성을 대내외에 나타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망명 정부는 정통을 잇는 왕손 등을 내세워 대표성을 인정받고, 일사분란하게 활동하면서, 결국 독립국가로 계승되는 경우와 우리는 너무도 달랐다.

일본의 임시정부와 독립단체들에 대한 집요한 방해공작과 탄압이 있었으며, 국내의 식민지정책도 내선일체(內鮮一體)가 강행되어, 더 이상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자포자기 상태가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변 강대국들이 그 나라를 보는 시각과 판단, 이를테면 일본은, 큰 전쟁을 일으킨 저력이 있으며, 끝까지 천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나라를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대한민국은 중심(임시정부 등)도 흔들리고, 독립 의지도 약했으니, 강대국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분단 같은 불행한 역사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71년 전, 분단이 된 상황이 이제 다시 통일에 있어서도 되풀이 된다면 어쩔 것인가? 북한이 핵, 미사일로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남한은 정치가 분열되고, 이를 틈탄 종북 세력들의 끊임없는 선동, 더구나 일반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마저도 멀어져가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가 소망하는 통일이 아니라면 다시 남(미국, 중국 등)의 탓만 할 것인가?


김종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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