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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X팬오션의 전신 범양상선 세무사찰’
‘STX팬오션의 전신 범양상선 세무사찰’
  • kukse
  • 승인 2012.01.1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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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순강 소장의 ‘택스 프로파일러(tax profiler)’
   
 
 
역대 정권들의 부정부패, 수십년간 계속된 국세청장들의 수난을 ‘도덕성 문제’ 만으로 밝힐 수 없는 복잡다기한 요소들이 작용한다. 법률적ㆍ제도적 시스템의 장단점을 거론하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항이 많다.

우리는 세금의 심연을 보아야 한다. 국민에 대한 배려ㆍ철학적 고뇌ㆍ역사적 성찰과, 근본적으로 ‘조세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본지는 특집으로 [허순강 소장의 ‘택스 프로파일러(tax profiler)’]를 연재 한다.

허순강 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금작가로서 ‘세금 이야기’의 시대를 열었다. 그가 풀어나가는 이야기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세금의 문제점을 동ㆍ서양, 현재ㆍ과거를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범양상선탈세사건은 ‘대한민국 現代史’

가. 범양상선에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함축

많은 사람들은 STX팬오션은 알아도 범양상선을 아는 이는 드물다. STX팬오션의 전신이 범양상선이다. 범양상선은 1966년 개업(국세청 개청년도와 동일), 1970~1980년대 해운업계 1위이기도, 부실기업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오너와 전문경영인간의 갈등으로 1987년 오너가 투신자살했고, 이로 인해 국세청의 세무사찰과 검찰 수사를 받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다. 이후 법정관리를 겪다가 회사가 정상화되어 2002년 회사정리절차가 조기에 종결되었고, 2004년에 최대주주가 STX 조선으로 변경되었고, 상호도 STX Pan Ocean으로 변경되어, 현재는 세계 5대 선사를 목표로 노력 중에 있다.

범양상선과 STX팬오션은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기업발전과정과 영욕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범양상선의 세무사찰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은 IMFㆍ금융위기ㆍ 저축은행부실사태 등 더욱 심화되었고, 그 피해는 국민 전체가 짊어지고 있다.

나. STX팬오션의 개요 및 재무현황ㆍ연혁.

STX팬오션 주식회사의 전신은 1966년 설립된 범양상선(당시 명칭은 범양전용선주식회사)이다. 주업종은 해상운송업으로 2010년 현재 자본금 2,058억원, 매출 6.5조원이고, 직원은 2,700여명이, 가동중인 선박은 300척에 이르는 세계적인 해운회사이며, 주요 연혁은 다음과 같다.

- 1966년 5월 : 범양전용선주식회사 설립
- 1966~1971 : 국내 최초 원양 대형 유조선 운송시작
- 1972~1973 : DRY CARGO 운송 부문 사업영역 확대. 외항 해운 수입 1억불 돌파
- 1974~1976 : 보유선대 20척, 700,000 DWT 규모로 확대 (국적 선대의 29.5%)
- 1977~1982 : 제 3~5 회 해운의 날 표창. (대통령 표창, 1억불탑, 2억불탑)
* 이 기간 중 87.4.19. 박 회장 투신자살, 87.5.16일까지 세무사찰과 검찰 수사
- 1983~1998 : 범양상선 상호 변경 (1984년). 보운, 삼미해운, 삼익상선, 대양선박 합병.
- 1988~1998 : 구주-극동간, 한-중간 컨테이너 SERVICE 개시
- 1999~2003 : 채권은행단 출자전환 의결, 정리계획 변경 (안) 법원 인가(2002-02-06). 출자전환 완료 (자본금 1,515억원) 및 회사정리절차 조기 종결
- 2004 : 최대주주 STX 조선으로 변경. 강덕수 회장, 이종철 대표이사 선임. STX Pan Ocean 주식회사로 상호변경 및 제2 창업 선포
- 2005 : 한국가스공사의 LNG선 운영선사로 선정. 한국 최초 싱가폴 증권거래소(SGX) 상장
- 2006 : 한국 CFO 대상 및 한국 재무혁신기업대상’ 최수우상 수상. 제 43회 무역의 날 ‘20억불 수출의 탑’ 수상
- 2007 : 무역의 날 ‘30억불 수출의 탑’ 수상. 한국 증권선물거래소 상장.
- 2008 : 무역의 날 ‘60억불 수출의 탑’ 수상.
- 2009 : 국내 선사 최초로 국제 LNG 수송 시장 참여. 세계 최대 철광석 업체 브라질 발레, 7조원 규모 장기 수송 계약 체결.
- 2010 : 세계 최대 펄프업체 브라질 피브리아社, 약 5.5조원 규모수송 계약 체결

다. STX팬오션의 전신인 범양상선의 1987년 어두운 역사

세계 5대 선사로 도약하려는 STX팬오션에는 밝은 현재와 미래의 이면에는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 1987년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투신자산과 이어진 국세청의 세무사찰과 검찰의 수사가 그것이다. 이제 어두운 현장으로 여행을 떠나자.

2. 범양상선 세무사찰을 전후한

1987.4~6월 중의 시대상황

1987.4.19. 범양상선 박00 회장 투신자살하여 국세청이 세무사찰을 하였고, 1987. 5. 16. 에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므로써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경제사건을 떠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즉, 1987.4.13.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 선언에서부터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촉발된 6월 항쟁과 이어진 이한열군 사망사건을 종합적으로 보아야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다. 학생ㆍ시민ㆍ야당의 저항에 의해 정치적 민주주의는 이룰 수 있었지만, 국민들의 무관심 및 무지에 의해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 사건이었음에도 그 진상이 숨겨질 수 밖에 없었다. 즉 범양상선 세무사찰 및 검찰수사결과는 군부독재에 의한 축소ㆍ조작사건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선언과 6.29선언.

범양상선 세무사찰이 있었던 기간은 공교롭게도 전두환 정권을 마무리 할 상황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종전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치르겠다는 4.13선언을 발표하였고, 이로 인하여 국내의 정치상황은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또한 1987년 1월에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정국에 뇌관으로 작용하였다. 이 고문치사사건이 사망 경위가 은폐·조작되었음이 밝혀지고 고문 가담자가 드러나기까지의 1단계와 재차 행해진 축소·조작의 전모와 그 관련자들이 밝혀지기까지의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사건은 6.10 항쟁으로 이어졌고, 또한 연세대학생 이한열의 최루탄 사건이 발생했고, 국내 정치상황은 극도의 혼란 그 자체였다.

학생ㆍ시민ㆍ야당의 극렬한 반대로 여당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미국에서도 의회 및 정부 지도자들이 전두환 정부에게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결국 6.29 노태우 직선제 수용을 선언하면서 정국은 가라앉게 되었다.

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朴鍾哲拷問致死事件]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1987년 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된 박종철이 수사과정에서 고문으로 죽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4·19혁명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 변동의 복잡한 성격을 보여준 사건으로서 이른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은 박종철의 사망 경위가 은폐·조작되었음이 밝혀지고 고문 가담자가 드러나기까지의 1단계와 재차 행해진 축소·조작의 전모와 그 관련자들이 밝혀지기까지의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다. 이한열, 최루탄 맞고 사망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반전두환운동에 가담, 1987년 시위 참여 중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여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1987년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22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해 중앙일보,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87년 7월 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3. 범양상선 세무사찰의 전말

1987.4.19. 범양상선 박00 회장의 투신자살에서부터 국세청의 세무사찰과 검찰의 수사를 마무리하고 1987. 5. 16. 검찰의 수사결과발표를 한 것이 세무사찰의 전말이다. 이 사건의 과정을 먼저 살펴본다.

가. 범양상선 세무사찰 일지

나. 부실기업과 자살

범양상선의 세무사찰 이전에 이 사건에 대한 전말ㆍ사실관계ㆍ원인분석을 정확하게 예측한 보도가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예언하고 있다. 이 내용과 나중에 언급하는 국세청과 검찰의 결과발표를 비교하면 왜 이것이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보도 내용의 요지이다.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이 1조1200억원의 빚에 시달리고 인간관계의 불화를 비관하고 투신자살했다. 사람의 자살은 타인에게도 충격을 준다. 4.19일 일요일 오후, 범양상선의 박건석 회장의 자살은 10층 빌딩에서 투신을 했다는 그 방법과 더불어 비록 부실기업이긴 하나 대기업의 창업주의 자살이라는데서 그만한 사회적인 충격이 될 수 있다. 유서에는 맺힌 한과 속으로 끓던 원까지 나신처럼 던져진듯한 내용이 있어 인간관계의 비정함에 송연함을 느끼게 한다.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회사를 경영하고자 모인 사람들끼리도 경영이 어려워지면 그렇게까지 이를 수도 있다는 인간관계의 비정스러움을 되씹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주를 자살에까지 몰아넣은 한 대기업의 부실화는 그 기업체나 기업주의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 여파가 확산되면 국가적인 가외의 재정부담이 늘고 결국은 그 부담이 모든 국민에게로 골고루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흥망이 다분히 경제정책이나, 금융제도의 운용과 관계가 있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진다. 국민경제, 국민부담에 직결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경제정책이나, 금융제도의 부실을 타고 부실기업을 있게 하고 낳아놓고나서 살아도 덩떵거리며 사는 숱한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그는 드물게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전례를 남긴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사회적이며 공공적인 책임을 지는 자살과 절체절명의 비운을 짊어진 자살의 의미를 각각 엄숙히 물으며 되새겨 보게 된다.

1) 범양상선 박00 회장 왜 自殺했나

범양상선 박00 회장의 직접적인 자살 동기는 유서에서 밝혔듯이 회사경영을 둘러싼 내분이었다. 또 외화도피문제로 관계당국이 내사를 시작한 것이 자살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해운업계의 장기불황과 범양상선 유조선의 기름유출로 인한 서해안오염사고, 박 회장의 건강문제 등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해운업계의 대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해운항만청 등 관계기관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박 회장과 전문경영인인 한상연 사장 간에 회사 운영과 인사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표면화로 주위에서 걱정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지난 4일 해운합리화 보완대책 발표 직후 해운항만청은 6대 원양선사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회사내분이 있을 때는 항만청이 직접 개입 하겠다”고 경고 하였었다.

2) 범양상선 박00 회장은 누구인가

박회장은 어려서부터 부유한 집안의 온상에서 성장해 외부의 충격과 갈등에는 여리다고도 하며, ‘베일속의 기업인’이라고도 한다. 박회장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서울대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직후에 아버지로부터 석유대리점 미륭상사를 이어받은 것이다.

박씨가 재벌로 발돋움하게 된 전기를 마련한 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걸프사와 제휴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어실력과 사교성으로 그는 유공의 석유수송을 독차지 했다.

걸프사로부터 차관을 받아 배를 사고 다시 걸프사에 용선해주는 그야말로 엄청난 특혜를 안고 그의 기업은 뻗어 나갔다. 이런 이유로 범양의 배후에는 막강한 정치적 배경설이 재계에 퍼졌다.

실제 1978년 미국 하원 국제기구소위원회의 한미관계보고서는 “걸프사는 박건석씨가 고위층과 그 주변인물의 총애를 받고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범양 전용선에 석유수송권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두산그룹 등과 공동출자, 동남증권 등 제2금융권에까지 영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해운불황으로 급격한 쇠퇴기를 맞았다. 급기야 1984년에는 정부해운합리화계획에 따라 세방해운 등 7개사를 인수, 선박 83척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선사가 됐으나 경영난은 여전했다. 오히려 무리한 통폐합으로 빚더미만 늘어나 통폐합전 3500억원의 부채가 지난 3월말에 1조 863억원에 달했다.

‘부실기업인’ㆍ’반사회적기업인’ 등의 표현에 신경질적이라 할만큼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박회장은 최근들어 자신에 대한 외화도피설과 함께 세무당국의 내사 등으로 더욱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회장의 동생은 ‘코리아 게이트’로 널리 알려진 박동선씨다. 박씨는 동생 동선씨와는 사업에서 일정한 선을 긋고 각자의 길을 걸었다.

3) 범양상선 한00사장은 누구인가

한00 사장(52)은 서울태생으로 경기고 서울대상대를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전문경영인이다. 1966년 범양전용선 설립 당시 대한해운공사 관리계장으로 있던 한사장은 대학 6년 선배인 박회장에 의해 기획실 차장으로 스카우트 되어, 70년대초 수완을 발휘, 회사를 일약 대기업으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공신역할을 했다. 4년 만에 상무로, 1978년에는 사장자리에 올랐다.

한사장은 해운업계는 물론 금융계, 관계, 정계 등에 폭넓은 교우관계를 자랑했다. 특히 김우중 대우 그룹 회장과는 르망승용차의 대미수송권을 따냈을 정도로 사이가 가까왔다는게 주변의 얘기다.

한사장은 점차 회사의 실권을 잡아가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박회장이 부실기업정리 등으로 코너에 몰려 많은 실권을 한사장에게 넘겨줌으로써 더욱 가속됐다. 한사장은 회사조직에도 학연 등으로 인연 맺은 자기사람을 많이 확보함으로써 경영권을 사실상 거머쥔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박회장이 고용경영인인 한사장을 밀쳐내지 못한 것은 한사장이 범양상선의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사장이 박회장의 외화도비 등 범법사실을 국세청에 투서, 내사를 받게 한 것만 봐도 그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사장 역시 주변에서는 회사돈을 많이 빼돌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엄격한 성격의 한사장은 말단사원에게는 관대하지만, 임원에는 조그만 실수도 용납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어찌보면 박회장과의 갈등도 이같은 완벽주의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4)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유서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은 자살할 당시 양복에 2통의 유서가 있었다. 이 유서 내용은 다분히 주관적인 면이 강하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사실관계를 밝히고 있다. 유서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직원에게 남긴 유서에서 자신과 경영분규를 빚어온 한사장과 한사장 지지중역인 부사장 전무 상무 등 3명의 이름을 거명하며 “사리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사를 악용하는 전문경영인?” 이라고 서두를 꺼낸 뒤 한 사장에게 “퇴진과 함께 인간이 되시오.”라고 했고, 나머지 3명의 중역에게도 “회사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깊이 반성하고 새 사람이 돼주기를 바란다” 고 했고, 다른 사원들에게는 “일치단결해서 이 난관을 극복하고 빛나는 범양이 되기를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또한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에서는”나는 한상연이가 계획한 덫에 치였다. 2~3년 전부터 알고 최선을 다하여 원만히 갈려고 했지만 이번 조사로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 것을 알았다는” 등의 표현으로 한사장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최근 세무당국으로부터 받은 외화도피혐의 조사가 한사장이 제포했을 것임을 시사했다.

아내에게 “명예롭게 남에게 폐가 안 되게 살려고 했지만 끝을 이렇게 맺자니 한스럽다. 끝내 당신을 못보고 갑니다. 아이들과 양쪽 어머니 잘 부탁하오” 라고 적혀 있었다.

5) 국세청 특별세무조사 착수.

22일 국세청은 박회장과 한사장의 외화도피 혐의에 대하여 특별세무조사에 착수하였고 “투서내용의 50% 정도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6) 서로 상대방이 ‘건’ 많았다 비방

박건석 회장과 한상연 사장에 대한 국세청의 내사는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국세청의 추적조사는 거의 완벽하여, 박 회장의 경우 내사 때 녹음한 테이프만도 상당량이 된다고 한다. 국세청은 이 같은 자료와 투서 등을 근거로 박 회장과 한 사장 가택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한 사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서는 거의 나온 것이 없었다. 국세청 직원들도 이렇게 검소하게 사느냐며 놀랄 정도였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박 회장은 박 회장대로 “한 사장 쪽에서 ‘건수’가 더 많이 적발됐다.”고 주장하는 등 두 사람간의 불화는 내사단계에서도 그대로 노출됐다고 한다.

7)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

범양상선파문이 번져가고 있다. 처음에는 ‘누가 잘못한 것이냐’고 저울질하더니, 이제는 ‘누가 더 나쁜 사람이냐’며 옥신각신하는 양상이다. 이처럼 두 사람이 모두 매도당하는 강도는 외화유출을 비롯, 호화생활-축첩사실 등 사생활이 들춰지는 속도에 따라 강해지고 있다.

돈많은 사람들의 ‘비밀금고’와 겉모습이 공개되면서 일반관중들은 더욱 흥분한다. 그러나 이번 범양상선사건은 기업인들에게는 미묘한 편싸움 같은 것을 유발하고 있다.

재벌그룹의 창업자와 전문경영인, 대주주와 고용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노출시키고 있는 꼴이다. 이를테면 오너 입장에서는 한 사장을 ‘키워놓고 보니 주인에게 덤빈 개’ 또는 ‘시저를 반역한 브루투스’로 비유하면서, 전문경영인의 도전에 일말의 위협을 느끼는 것 같다.

반면에 월급장이로 고용된 경영인 입장에서는 한사장의 지나친 행동을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그에게 동정과 지지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그만큼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이번 사건을 해석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결국 범양상선 파문은 우리 기업사에서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갈등을 첨예화시켯다는 해석이다. 물론 두 사람의 개인적인 행적을 두둔할 수는 없지만 오너와 전문경영인은 공생공사하는 보완관계라는 교훈을 남겨줬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사건은 한낱 한 개인의 죽음과 돈 많은 인간들의 더러운 구석을 들춰 보며 시시덕거리는 잡담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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