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임금 세종은 현군이었던 것 같다. 곡물상이 무게를 속인다는 민원이 속출했을 때였다.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세종은 엉뚱한 해법을 내놓는다. 저울을 많이 만들어 보급하라는 것이었다. 저울의 독점을 없애니 속임수가 저절로 사라졌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세종이 만든 시계, 악보, 도량형, 천체측각기, 측우기 등은 모두 계측 내지 기준에 관한 것이다. 계측이나 기준은 저울(scale)이나 자(rule)라는 도구가 필요한 법인데, 도구의 중요성을 세종은 간파했던 것이다.
국민의 세금부과 등을 비롯해 60여 항목의 ‘자’라 할 수 있는 부동산 공시가격 제도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정부가 공시가격을 매년 순차적으로 인상해 시세의 90%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는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발표하면서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11월 3일 발표한 공시가격 현실화율 제고 로드맵은 현재 시세의 50%~70% 수준에 있는 공시가격을 2021년부터 매년 3%포인트 수준으로 10~15년에 걸쳐 현실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단독주택은 2035년까지, 공동주택은 2030년까지, 토지는 2028년까지 현실화율 90%를 목표로 한다. 정부는 부동산 공시가격을 시세에 준하게 올려야 자산가치에 맞는 공평한 과세가 이뤄질 수 있고, 종류별·가격대별 형평성도 맞출 수 있다고 한다.
정부가 공시가격 현실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2019년도 공시가격 발표 때부터다. 당시 고가 단독주택을 중심으로 공시가격이 대폭 올라 서울은 전체 표준 단독주택의 공시가격이 전년 대비 평균 17.75% 인상됐다. 공동주택의 경우 약 14%가 인상돼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인상률이었는데, 특히 시세 12억원(공시가격 9억원) 이상 고가주택은 평균 인상률이 20%를 넘어설 정도였다. 2020년에도 마찬가지로 시세 9억원(공시가격 6억원) 이상 주택으로 현실화 대상을 확대해 2019년을 넘어서는 인상률을 보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30억원 초과 공동주택은 현실화율이 2018년 67.1%에서 79.9%까지 뛰었고, 15억원 초과 30억원 이하 주택은 66.7%에서 74.6%로 상승했다. 만약 20억원짜리 주택이라면 공시가격이 2018년에는 13억원대였지만 2020년에는 15억원 가까이로 뛰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공시가격 인상 드라이브의 연장선상이 바로 이번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공시가격이 기준 없이 들쑥날쑥하다는 점은 그동안 꾸준히 지적돼온 문제다. 부동산 전문가들 중에 공시가격 현실화라는 방향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중저가 주택보다 고가주택의 공시가격 현실화율이 상대적으로 더 낮거나, 같은 가격대라도 단독주택과 공동주택의 현실화율이 차이가 나는 현상 등이 지금까지 제기돼온 대표적인 문제들이다.
부동산공시법은 공시가격을 적정가격으로 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적정가격이란 시장에서 정상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경우 성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인정되는 가격으로, 시세의 개념에 가깝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현실적으로 공시가격과 시세의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관행적으로 공시가격 현실화율(시세 반영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당연히 현실화율 90%라는 개념은 실지가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지가격의 측정이 정확해야만 현실화율을 정하는 의미가 있다.
부동산 공시가격은 토지의 경우 표준공시지가 및 개별공시지가, 주택의 경우 표준주택가격 및 개별주택가격과 공동주택가격이 있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감정평가사가 조사 및 감정평가를 하고, 표준주택가격 및 공동주택가격은 한국감정원이 조사·산정하여 적정가격을 산출한 후 현실화율을 반영해 정한다.
지난 7월 지인이 재산세 납세고지서를 들고 필자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강남역 근처 오피스텔을 2019년 11월에 4억5000만원에 산 뒤 올해 첫 재산세 고지서를 받은 경우였다. 고지서에 적혀 있는 재산세 산출근거에는 공시가격이 5억5000만원이었다. 공시가격이 실제거래가액(반년 쯤 전이지만) 보다 1억원이나 높은 사례였다.
보유세가 오르자 공시가격 산정 기준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2018년 공동주택 공시가격 이의신청 건수는 1290건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3만7410건으로 늘어났다. 대부분 공시가격을 더 낮춰달라는 요구였다. 공시가격 현실화율이 2021년부터 3% 포인트씩 올라가면 이의신청도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공시가격 현실화 이유로 국민부담의 공정성과 형평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왜곡돼 왔던 부동산 유형별·가격별 불균형으로 인한 조세의 불형평성과 불공정성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기도 하다. 2019년부터 현실화율이 상향 조정됨에 따라 재산세·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는 이미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발표 내용대로 매년 3% 포인트로 현실화율을 조절하더라도 국민의 체감 세부담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화 기준이 되는 실지가격이 계속 상승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세부담 증가에 대한 여론을 의식한 정부가 1주택자 공시가격 6억원 이하는 재산세를 과세표준 구간별 0.05% 포인트 세율을 인하해 준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3년(2021년~2023년)간의 유예기간이 지나면 그동안 누적된 세금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정부는 공시가격의 현실화로 보유세 등이 상승하면 다주택자 소유주택 및 고가주택들이 매물로 나와 부동산 가격이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임대차 3법과 더불어 오를 대로 오른 부동산 가격을 정부가 공시해 주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인상된 공시가격은 국민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공시가격이 오르면 이로 인해 복지혜택에서 탈락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세금을 걷어서 복지에 쓸 것이냐, 현재의 복지체계를 유지하면서 세금을 덜 걷을 것이냐의 문제일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운영할지 국민적 공감대가 먼저 필요하다.
공시가격 산정의 정확도는 이미 수차례 도마에 오른 바 있다. 한 건물의 아파트가 층이나 향 등 각 주택 특성에 따른 차이 없이 일괄적으로 같은 공시가격이 매겨지거나, 같은 단지 아파트인데도 평수가 더 큰 아파트가 작은 아파트보다 더 낮은 공시가격이 매겨지는 등 지금까지 밝혀진 오류 사례도 다양하다. 하지만 이번 현실화 계획에서도 이 같은 오류를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2019년 국토부는 “부처 간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복지제도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2년이 넘는 동안 이 TF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구체적으로 발표된 적도 없다.
또 공시가격 제도의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도 있어야 한다. 공시가격은 ‘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과세표준을 정하는 것은 세법에서 정할 일이다. 부동산 가격은 그대로인데 ‘자’의 눈금을 늘려서 세율을 적용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결론적으로 부동산별 실거래가격 및 공시가격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공시가격을 현실화하려는 것이라면 먼저 실지가격이 정확하게 측정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격 측정방식이 체계적·과학적이어야 하고, 산정 과정 또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현실화율을 적용하면서 급격한 세부담이 발생하면 공평한 세금체계에 맞추어 세율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세율은 그대로 두고 공시가격만을 단기간 내에 현실화한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며, 이는 사실상 증세를 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세종은 민생과 관련된 공법(貢法) 도입에 무려 18년을 기다렸다. 백성의 25%에게 직접 가부 의견을 물었고, 시범실시를 통해 혹시 모를 시행착오에 대비했다. 세종 임금의 지혜는 600년이 지난 지금도 배울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