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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이사장 “인생의 마지막 갖고픈 직책은 ‘감동공장 공장장’”
조용근 이사장 “인생의 마지막 갖고픈 직책은 ‘감동공장 공장장’”
  • 이대희 기자
  • 승인 2021.11.01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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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세무사 노블레스 오블리주 - (3)조용근 석성장학회 이사장(전 한국세무사회장)
-“그건 우리 것 아니잖아요?”... 아내의 한 마디가 ‘석성장학회’ 20년 선행(善行)의 시작
-기금 84년 5천만원이 83억으로 160배로 늘어…석성세무법인 매출 1% 기부 약속 지켜
-석성장학회·석성1만사랑회·밥퍼 명예본부장·천안함재단 이사장 등 그의 모든 직책은 봉사
-밥퍼봉사 교과서에 소개, 고검청사 조형물에 ‘얼굴’ 부조…“나눔실천 인정에 뿌듯함 느껴”
조용근 재단법인 석성장학회 이사장(전 한국세무사회장)
조용근 재단법인 석성장학회 이사장(전 한국세무사회장)

조용근. 그가 이끄는 ‘석성장학회’의 끝을 알 수 없는 나눔과 섬김, 선행(善行)의 질주가 계속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5000만원을 종자돈으로 94년 출범한 석성장학회는 27년이 지난 지금 기본재산이 83억 원으로 늘어 160배로 덩치가 커졌다. 재단법인으로 정식 인가를 받은 것이 2001년이어서 공식적으로는 올해가 석성장학회 설립 20주년이다.

석성장학회와 함께 전국 중증장애인들의 보금자리 마련에 쉼 없는 행보를 이어가는 사단법인 ‘석성1만사랑회’ 또한 올해로 발족 10주년이 되었다.

20여년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고 있는 조용근 석성장학회 이사장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 “그건 우리 것이 아니잖아요?”... 아내의 한마디가 장학재단 설립으로

조용근 이사장은 1984년 부친이 남긴 한옥을 처분했는데 당시 돈으로 5000만원이었다. 10년간 재테크를 한 결과 1994년 2억 원으로 불어났다.

그 해가 공무원 재산등록제를 처음 시행할 때인데 아내와 이 돈을 어떻게 할지 상의했다고 한다.

“솔직히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점포라도 하나 사 아이들 학원비라도 보탤까, 개인 재산으로 등록해야 하는지 등 고민을 많이 하던 차였다”면서 “공무원으로 현직에 있을 때이니 판단에 상당히 조심스러웠다”고 조 이사장은 털어놨다.

그런데 아내의 단호한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그건 우리 것이 아니잖아요?”

돌아가신 아버지 명의로 돼 있었던 것이니 우리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는데 그게 단순하게 들리지 않았다. ‘석성장학회’ 태동의 시발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어머니와 피터지게 싸우는 걸 보면서 ‘왜 저렇게 다툴까?’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못 배워서 그렇다’는 답을 성년이 된 뒤에 찾았다는 조 이사장. 두 분 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일자무식이었다.

“그런데다 형편이 학교 다닐 처지가 못돼 고등학교 때는 가정교사에다 신문 돌리고, 심지어 복조리 장사도 하는 등 고생깨나 했지”라며 조 이사장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돈 벌러 일본에 나간 상황에서 6.25전쟁이 터져 어머니와 형, 누나, 남동생 다섯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경남 의령의 외가로 피난을 가서 더부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영양실조로 동생을 잃었고, 조 이사장은 사경을 헤매다 어머니와 외갓집 식구들이 잡아준 들쥐 50여마리를 먹고 되살아났다며 지독한 가난을 얘기했다.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파 외갓집 본채에 삶아놓은 보리쌀을 11살이었던 형과 조 이사장(5살)이 광주리채 먹어치웠는데, ‘죽여버리겠다’며 지게 작대기를 든 외할아버지를 막아선 어머니가 ‘빨리 도망가라’고 해 팬티 바람에 뒷산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시절 불우했던 환경에 한이 맺힌 조 이사장은 “어려운 아이들을 배우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비수로 찌르는 듯한 아내의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그 한마디가 사실상 오늘의 ‘석성’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꾸어오던 장학사업의 꿈에 “아내가 불을 질러버렸다”고 그는 표현했다.

‘석성장학회’를 만들어 나눔과 섬김의 사역을 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무보수 봉사로 일관해 온 아내에게 항시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웃는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상당 기간을 집에서 모셨는데 의사 지시에 따라 아내가 두 시간 단위로 시아버지 엉덩이에다 몰핀 주사를 놓는 걸 보고 많이 놀랐는데, 그런 ‘강단(剛斷)’이 석성장학회 탄생에도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은근히 아내 자랑이다.

1985년 강원도 정선에서 가족과 함께 장학금 전달에 나서면서...
1985년 강원도 정선에서 가족과 함께 장학금 전달에 나서면서...

◇ 장학회 인가 전에도 화전민촌 등에 개인 장학금 지급…사전 트레이닝

그래서 장학회 명칭도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 가운데 글자를 하나씩 따 ‘석성(石成)장학회’라고 하니 아내도 동의하였고, 짓고 보니 부르기도 좋았다.

1994년 이렇게 이름을 짓고 즉시 인가를 받으려 했으나 재단법인의 기본재산이 3억 원에 못 미쳐 포기하고 ‘석성장학회’란 단체로 출발했다.

2억여 원에 대한 정기예금 이자수입으로 매년 강원도 정선과 평창 등 산골 화전민촌의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현지 목사들의 추천이 이어져 장학생 숫자도 매년 조금씩 늘어났다.

80년대부터 이미 조 이사장은 오지의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 틈틈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당시 자가용도 없어 여름 방학이나 휴가 때면 아내, 아들 딸과 시외버스를 타고 걸어서 장학금을 주러 다녔다고 회고했다.

“현직 세무공무원이 무슨 돈으로...” “뇌물 받아 운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마다 아내가 “남들 말에 괘념치 말고 열심히 운영하다 보면 진심이 통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하며 용기를 줬다고 조 이사장은 말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한지 7년이 지난 2001년 드디어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재단법인 석성장학회’ 설립인가를 받았다. 조 이사장은 “그 때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취임한 아내와 끌어안고 한동안 울먹였다”며 짠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립인가에 용기를 얻은 조 이사장은 ‘석성장학회는 다른 장학재단과는 무언가 달라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장학생은 성적 우수자 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학생들 위주로 뽑았고, 가급적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이 노력해 장학기금을 늘려보리라 마음먹었다. 여기에다 재단 운영에 소요되는 일반관리비를 최대한 줄이고 심지어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들도 100% 자원 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도록 했다.

◇ 장학회 기금 83억으로 27년 전보다 160배로 늘어나…연말 100억 넘어

“국세청 공보관 시절인 2001년 설립 등기를 끝내고 석성장학회가 출범했으니 올해가 딱 20주년이다. 사람으로 치면 성년이 된 것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조 이사장은 나눔 확대에 강한 의욕을 내보였다.

석성장학회는 정식인가 7년 전인 1994년부터 개인적으로 운영해 온 걸 포함하면 27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지난 9월말 기준으로 초·중·고·대학생 3400여명에게 무려 26억 원의 장학금이 전달됐다.

현재 장학회의 기본재산은 감정가액으로 83억5000만원에 달한다. 5000만원으로 시작한 것이 16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석성의 재산 30억 원에 지난 3월 죽마고우인 중학교 동기가 기부한 53억5000만원(시가 70억원)의 건물을 합친 액수다. 뿐만 아니라 그 친구가 이미 설립해 운영해 오고 있는 장학재단(기본재산 30억 상당)도 올 연말에 석성장학회로 흡수될 예정이어서 기본 재산은 100억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2012년 석성장학회 장학금 전달식 후 기념촬영
2021년 석성장학회 장학금 전달식 후 기념촬영

한 해 3억~4억 원씩 나가는 장학금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질문에 그의 설명은 명쾌하다.

“우선 석성장학회 순수 재산으로 운영되는 일반장학금은 기본재산 30억원으로 사놓은 생명보험 후순위 채권예금의 이자(4%) 수입 1억2000만원에다 세무법인 석성 본·지점의 매출액 1%인 8000만원을 합쳐 매년 2억원씩 지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석성 매출액 1%의 장학회 기부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여기에 지난 2월 죽마고우가 기부한 건물 임대료가 한해 1억5천만원인데 그 중 3분의 1인 5000만원은 경찰청과 MOU를 맺고 순직 경찰관의 유자녀에게, 나머지는 해양경찰청. 소방청 등 기관의 유자녀들에게 특별장학금으로 지급해 줄 예정이다.

대기업이나 재벌이 아닌 개인이 설립해 운영하는 장학재단에서 연간 3억~4억 원씩 장학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석성장학회의 놀라운 재단운영은 복지업계에서도 모범사례로 꼽힌다.

재단기금의 폭발적 성장에 대한 비결을 묻자 “능력도 있어야겠지만 나눔에 대한 본심이 통해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운영이 투명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석성장학회 이사장은 100% 자원봉사자이기 때문에 심지어 법인카드도 없다고 답한다.

‘나눔과 섬김의 아이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조 이사장은 국세청, 경찰청, 국방부를 비롯한 많은 기관과 기업체로부터 특강 요청이 줄을 잇는다. 그때마다 받은 적지 않은 특강료 전액을 석성장학회에 ‘기부’할 정도로 그의 뇌리에는 어떻게 하면 나눔을 확대할 수 있을까로 가득 차 있다.

석성1만사랑회가 건립한 '나눔의 집' 5호점 착공식 장면
2021.3월 석성1만사랑회가 건립한 '나눔의 집' 5호점 착공식 장면

◇ 또 하나의 나눔 ‘석성1만사랑회’, 중증장애인 ‘나눔의 집’ 6호점까지 건립

2001년 설립된 석성장학회가 자리 잡히자 조용근 이사장은 2011년에 또 하나의 나눔과 섬김을 시작한다. 가장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는 중증장애인 지원 공동체인 사단법인 ‘석성1만사랑회’다.

“중증장애인들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요?”라는 지인들의 주문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사재 5000만원을 들여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과 사단법인을 만들면 가능하겠다는 판단에서 밀어붙이기로 했다.

“1만 명이 매월 1만 원씩만 기부한다면 1억 원이 되는데, 그렇게만 되면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을 제대로 지원할 수 있다는 구상을 지인들에게 내비치니 기다렸다는 듯 모두 환호했다”고 설립 당시를 회고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 있었고 매달 100구좌(100만원)씩 돕겠다는 지인들도 나타났다.

조 이사장 자신도 솔선수범하자는 뜻으로 매달 100구좌(100만원)를 내고 있고, 대전지방국세청장으로 36년 국세공무원 생활을 마감한 대전국세청의 후배들도 어김없이 매달 100만원씩 성금을 보내온다고 한다. 1만사랑회 회원의 대부분은 세금 관련해 종사하는 ‘세금쟁이’들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이렇게 탄생한 ‘석성1만사랑회’는 매달 500여 기부천사들이 보내는 1000만원 남짓의 후원금으로 중증장애인 공동생활관인 ‘석성 나눔의 집’ 건립과 재활치료비 지원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벌였다.

처음에는 중증장애인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음성자동인식기’를 달아주고 휠체어 배터리도 교환 해주었다. 그러다 다시 착안 한 것이 중증장애인들이 마음껏 쉴 수 있는 ‘사랑의 쉼터’와 이들의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공동작업장’ 건립 등 영구적인 시설지원 사업이었다.

드디어 2013년 12월 ‘석성 나눔의 집’ 1호점을 충남 논산에 오픈했다. 이 쉼터는 2억원 가량이 지원되어 200평 대지에 30평 단층 목조건물로 축조됐으며 충청지역 장애인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사랑의 쉼터는 지금까지 전국 6곳에 건립됐다. 2호점은 경기 용인(2016년), 3호점 서울 양재동(2017년), 4호점 수원 중앙기독학교(2019년), 5호점 경북 구미시 도개면(2021.3), 6호점 강원 양양(2021.5)에 각각 건립됐다.

여기에다 경북 구미시에 지어질 7호점은 남성 중증장애인 공동생활관으로 11월 중 착공해 내년 5월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지난달 7일 건립비 2억원이 구미시에 전달됐다.

조용근 이사장은 “앞으로 더 많은 수호천사들의 기부를 이끌어 매년 1채 꼴로 중증장애인 쉼터를 지어줄 계획”이라며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낳는다는 확신을 사회에 심어주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미얀마 딸린3고등학교 정문에 붙여진 '대한민국 석성고등학교' 현판. 2018.1 현판 행사에 참가한 조용근 이사장 내외.
2018년 미얀마 '석성고등학교' 현판 행사에 참가한 조용근 이사장 내외.

◇ 국경 초월한 나눔실천…10년의 미얀마 학교재건이어 ‘학용품 공장’ 계획도

조 이사장의 나눔과 섬김은 국내 뿐 아니라 국경 넘어 해외에서도 빛을 발한다.

한국세무사회 회장을 맡고 있던 2007년부터 미국, 미얀마, 캄보디아, 아이티, 중국에 까지 나눔의 손길을 뻗쳐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바 있다.

특히 미얀마는 2008년 쓰나미가 덮쳐 8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재민, 재산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으며 해안가 지역은 폐허가 됐다.

조 이사장은 그곳 청소년들이 교실이 없어 공부를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500여명의 학생들이 어렵게 공부하고 있는 미얀마 양곤시 딸린지역 제3고등학교 재건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한국세무사회장 때 처음 미안마와 연결돼 지금까지 13년째 학교 재건을 해주고 있는데 석성장학회에서 50만 달러가 지원됐다”며 “8개동을 건립해 교실 부족난는 완전히 해소됐고, 실내체육관과 급수시설 컴퓨터교실 담장 등 기반시설을 모두 갖춰줬다”고 설명했다.

이런 그의 학교 재건에 대한 감사로 양곤시 교육당국은 2108년 학교정문에 ‘대한민국 석성고등학교’라는 간판을 달아주고 성대하게 현판식을 거행했다. 여기에다 “행사 때는 대한민국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는 예의를 갖추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다”는 조 이사장은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몇 년 전 미얀마의 행정 최고책입자가 만나자는 요청이 와서 당시 미얀마 주재 한국대사와 함께 만난 내용을 소개했다.

“그 책임자가 대뜸 ‘어떻게 우리 미얀마를 그렇게 도와주느냐’면서 ‘미얀마 학생들을 위한 학용품 공장을 하나 지어주면 안되겠냐’고 해서 순간 놀랐지만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는 것이다.

조 이사장은 “현지에서 생산할 샘플로 검토하도록 우리나라 학용품들로 1500개의 파우치를 만들어 지난달에 이미 그 당국자에게 보냈다”고 밝혔다. 딸린제3고등학교(대한민국 석성고등학교) 학생 1500명이 각자 1년 동안 쓸 수 있는 분량의 학용품 파우치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코로나 상황이 진정되면 뜻있는 지인들과 함께 자금을 마련하여 미얀마 현지의 학용품 생산공장 건립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라며 미얀마 학생들의 학업에 도움을 주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 교과서에 소개되고 고등검찰청 조형물에 ‘얼굴’ 그려져…“뿌듯함 느껴”

조용근 이사장은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 명예본부장’이란 별도의 직함을 갖고 있다. ‘다일복지재단’을 이끄는 최일도 목사를 알게 된지 25년째 청량리 밥퍼본부에서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처음에는 최 목사를 개인적으로 돕는다는 생각에서였지만 막상 참여해보니 나눔과 이웃사랑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며 “그래서 세무법인 석성 개업 때는 물론이고 세무사회장 취임식 때 받은 축하금, 딸 결혼식 때 받은 결혼축의금 상당 부분을 그곳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 매달 100만원씩을 후원하고 시간 날 때마다 석성 가족들과 함께 밥퍼 배식에 동참하고 있다.

조 이사장의 이런 나눔과 섬김의 선행은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학생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10년 3월 서해상에서 천안함 함정이 NNL 작전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어뢰에 맞아 46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2월 그는 희생장병 추모사업과 유가족 지원, 생존장병 지원 등을 위해 만들어진 천암함재단의 이사장에 추대됐다.

석성장학회의 모범적인 나눔 활동을 이끈 조 이사장이 국민성금으로 만들어진 천안함재단을 투명하게 운영할 적임자라는데 추진위원회 위원들이 동의한 결과다.

“조 이사장은 재단에서 제공하는 신용카드를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매달 회의 때 받는 10여만원의 교통비까지 재단에 반납하고 웬만한 경비는 개인 돈으로 지출하는 고지식함을 보였다”는 당시 재단측 관계자의 증언은 그가 얼마나 투명성에 신경을 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자원봉사의 자세로 6년 동안 천안함 유가족과 생존장병 지원사업을 벌인데 대해 해군당국은 창설 이래 12번째 ‘명예해군’으로 위촉해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또한 조 이사장은 2011년 서울고등검찰청 항고심사위원회 민간위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듬해 전용 청사 준공식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청사 앞 잔디광장에 청동으로 만든 특별조형물 ‘아름다운 세상’에 조 이사장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던 것.

조 이사장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단순히 항고심사위원이어서 조형물에 얼굴이 새겨진 게 아니라 그동안 해온 나눔과 섬김의 활동이 참작된 것이었다”면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서울고등검찰청 조형물에 새겨진 조 이사장 얼굴이 새겨져 있다.
서울고등검찰청 조형물에 조용근 이사장 얼굴이 새겨져 있다.

◇ 전문자격사는 국민에 감동줘야…‘감동공장 공장장’이 인생 마지막 직책

“세무사와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 전문자격사들은 사회를 위해 어떻게 봉사할거냐를 항시 고민하고 국민에게 감동을 줘야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조 이사장은 제언한다.

“요즘 세간의 이슈가 되고 있는 성남시 대장동 사건에서 보듯 대형비리 사건에 일부 전문자격사들이 개입되어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는 자격사에 대해 '도둑놈' ‘사기꾼’ 등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며 우리 세무사들도 대접만 받으려 하다가는 예외가 될 수 없다고 그는 우려한다.

돈을 벌 때는 벌더라도 그에 상응하여 작은 것부터라도 나누고 섬기는 자세를 갖춰야만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제 나이가 70 중반이지만 마지막으로 맡고 싶은 직책이 하나 있다”며 “다름 아닌 ‘감동공장 공장장’이야”라고 힘주어 말한다.

조용근 이사장의 끝을 모르는 나눔과 섬김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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