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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축구의 원형질
[칼럼] 축구의 원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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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7.0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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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정칼럼] 김진웅(NTN 논설위원)
   
 
 
2006년 월드컵! 프랑스는 Art soccer로 스페인을 3대1로 대파하였다. 우리한국팀은 그런 프랑스를 대등하게 밀어 붙였다. 그러나 할 말 많은 한?스위스전을 끝으로 이제는 차라리 마음 비우고 월드컵 축구를 관전하게 되었다.

사실 축구처럼 국민적 결속을 가져 오는 스포츠도 없다. 국가대항전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한일전은 심정적 대리전쟁이다. 모두에게 져도 일본에게 져서는 아니 된다. 아무리 보아도 축구는 사냥과 전쟁의 변형이다. 골대는 적의 성이다. 수비수는 성의 방위군이다. 그들을 제치고 골을 차 넣는 것은 적군 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골! 그 것은 승전을 의미한다.

원시 시절 여러 명이 떼지어 미리 약속된 막다른 외통수로 들짐승을 몰아간다. 포위된 짐승을 잡는다. 골인이다. 그리고는 그날 밤 살코기 카니발이 열린다. 골 세리머니가 없어서는 아니 되는 이유이다. 인류는 털이 없어 떨어야 했고, 날카롭고 긴 송곳니가 없어 개별 사냥도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다중의 팀 플레이로 그런 핸디캡을 극복하고 번성하게 되었다. 집단화는 생존의 기술이 되었다. 그러나 집단은 사냥감이든 상대국이든 정복하여야 하는 유전인자를 지니게 되었다.

무리 짓기와 선진지수

취약한 인류는 일찍이 무리 짓기(집단화)가 곧 생존방법이자 힘이라는 것을 체득하였다. 그리고 집단의 정복 동인은 스포츠에서는 승부로 발현되고, 학교에서는 특별활동을 통한 콩쿠르 등으로 발현되어 건강하다. 그러나 공부만 자꾸 시키니 아이들 사회에서는 집단형성의 이상 세포증식이 일어났다. 교실에 만연한 왕따 현상이 바로 그 것이다. 왕따도 따지고 보면 피 속에 흐르는 원시시대 사냥 유전자의 발현이다.

나쁜 패거리일망정 거기에 가담하는 것이 보다 안전해진다는 것을 어린 애들도 본능적으로 안다. 패거리에 가담하면 사냥에 나선다. 희생양을 찾아야 한다. 곰이나 호랑이는 피한다. 노루나 토끼 정도가 좋다. 문명이 아무리 우리 삶 속에 심화된들 야성적 본능은 늘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리 짓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무리의 정복 동인을 붉은 악마들, 스포츠 클럽, 취미 동호회 등으로 이끌어 내는 사회적 유도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로 선진지수이다.

좋은 심판과 나쁜 심판

스포츠에는 미리 정해진 룰이 있게 마련이다. 그 룰을 운영하는 것은 레퍼리다. 레퍼리가 모국팀이라고 편파 판정을 하여서는 아니된다. 더욱이 레퍼리가 승부를 미리 결정하여 놓고 경기에 나간다면 이거야 말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레퍼리는 룰대로만 판정하여야 한다. 레퍼리가 정치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 스포츠는 망하게 된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이 탈락된 것은 심판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듯이 심판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선수, 관중, 레퍼리 자신은 물론 축구발전에 있어 불행이다. 축구 경기를 관전하다 보면 어떤 심판이 훌륭한 심판인지 찍어 내기는 쉽지 않아도 누가 편파적인 심판인지는 쉽게 가려 낼 수 있다. 부당한 심판을 하는 경우 관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야유가 고작이다. 그러나 힘이 없다고 간과하면 오산이다. 종국에는 관중이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민심이 떠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국세 불복 업무도 어찌 보면 스포츠 심판과 닮은 데가 많다. 부과자와 납세자 사이에서 공정하게 심판하여야 하는 불복 담당자들은 스스로에게 물어 볼 일이다. “나도 스위스 전의 레퍼리가 되고 있지는 않나?” “부당하게 편들기를 하고 있지는 않나?” “나는 정말 국민에게 좋은 심판일까, 아니면 내 조직에게 좋은 심판일까?”

파울 레퍼리

가령 불복을 제기한 어느 기업이 수십 쪽으로 된 과세처분이유서를 받는다. 당연히 한글이다. 외국의 관련사에 보내서 검토하여야 하니 번역을 하여야 한다. 전문용어로 되어 있고 분량이 많아서 영문으로 번역하는데 1주일 이상 걸릴 판이다. 그 것을 관련사에 전달하여 경위를 알아 보고, 영문 답변서를 받아 와서, 자기 회사 세무부서에서 이를 검토한 후 반론서를 작성하여야 하고, 이를 다시 한글로 바꾸어 불복당국에 제출하여야 한다. 이런 복잡한 과정상 불가피하게 수주가 걸린다.

그러나 그런 불가피한 기간을 기다려주지 않고 과세당국이 불복 결정을 한다면 납세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것이 적법하고 유효한 결정일까? 반론은 나중에 구두진술로 하라고 약속하고는 정작 출두하였을 때는 20분은 족히 설명하여야 할 그 많은 쟁점들을 단 오분 안에 간단히 말하라고 다그친다면 납세자는 어떤 심정일까? 사소한 절차적 공정성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불복은 권위가 사라진다. 불복 심리 ‘과정’ 자체가 합리적이고 믿음직하여야 그 결정이 비로소 신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NTS의 Service

과세당국이 납세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분야는 불복업무이다. NTS의 마지막 S는 ‘Service’이다. 조사를 하면서 서비스한다면 개그이다. 서비스가 어울리는 분야는 억울하다는 납세자의 심정을 진실하게 들어주는 고충신청, 적부심, 이의신청, 심사청구업무들이다.

과세당국이 서비스하고 싶다면 납세자가 억울하다고 스스로 찾아 왔을 때가 제대로 된 기회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세금 더 낼 구석만 찾아 다니는게 과세관청인줄 알았더니 국고주의에 매달리지 않고 선선히 돌려 줄줄도 알더라.’는 예상치(?) 못한 경험을 자꾸 시키는 것이 바로 서비스이다. 그러면 축구 경기가 고조되고 관중이 열광하듯이 시민들은 금방 국세 행정에 열띤 신뢰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세무조사로 민심을 얻기는 어려우나 불복업무로 민심을 얻기는 쉽다. 납세자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고, 내고 싶어하는 자료는 기다려 주면서 심리하면 된다. 납세자는 빨리 처리됨보다는 신중히 처리됨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납세자는 담당자가 ‘기한내 처리건수’를 채워주려고 불복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일이 밀린다고 눈 쓸어내듯 처리할 일이 아닌 이유이다.

불복 재고가 많다면 관리자는 ‘불복담당직원을 늘리는’ 근본적인 치유책을 강구하여야지 과적상태의 한정된 직원들만 채근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법 해석에 있어 과세자에 편리한 국고주의는 버리고 납세자에 편리한 납세편의주의를 과감히 도입하여야 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시민들이 원하는 혁신이다. ‘불복부서 역시 과세당국의 일부라서 결국 팔은 안으로 굽더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는 곤란하다. 납세자나 대리인이 찾아 가면 선선히 만나주어야 한다. 불복부서는 바로 그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혹여 면담을 내부통제하거나 자료제출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면 이는 어딘가 크게 잘못된 일일 것이다. 만에 하나 레퍼리가 정치적이면 최악의 레퍼리다. 그런 심판을 계속할 경우 관중은 환멸을 느끼고 모두 등을 돌릴 것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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