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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짜이야기] 근대 조선의 실학연구 및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세 사람
[세짜이야기] 근대 조선의 실학연구 및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세 사람
  • 日刊 NTN
  • 승인 2015.05.2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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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

세일회계법인 대표
(전 부산지방국세청장)

정조 임금의 개혁에 함께한 세 사람의 비슷한 운명

조선시대에 가장 오랫동안 왕좌에 있었던 임금은 21대 영조(재위 1724-1776, 52년)이고, 뒤를 이은 손자가 22대 정조(1752, 재위1776-1800, 24년)이다.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 사후 장조로 추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색당파의 폐해를 극복하는 탕평책(蕩平策)으로 조정내의 소통을 강화하고, 인재들을 중용하는 등 조선후기의 중흥(中興)의 기운을 떨쳤던 임금이었다.

이 시기 정조는 박제가(1750-1815), 정약용(1762-1836)과 같은 패기 있는 젊은 선비들을 등용하여 암행어사, 지방행정, 중앙부서에 배치하는 등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한편 이들과 맥을 통하던 이승훈(1756-1801)은 천주교를 도입하여 전래하고 있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 등, 강한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궁중의 알력, 당파 간 뿌리 깊은 권력투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쉽게 48세에 병사(독살설도 있음) 하였다.

더구나 이 시대는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 프랑스의 대혁명(1789년), 영국의 산업혁명(1760-1730년대) 등으로 전 세계가 크게 약진하고 있는 터에, 영민한 왕의 타계로 인해 우리나라는 어린 임금 23대 순조(8세) 이후 척신(戚臣)들의 세도정치 등 퇴행(退行)의 역사로 가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6살 터울의 삼총사들은 묘하게도 순조 즉위 해(1801년)에 직위해제 되어 귀양길로, 그리고 이승훈은 천주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다산 정약용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실학자,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이다.
1783년 소과에 합격, 22세 진사로 성균관에 진출, 정조의 총애를 받다가 1789년 대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중앙무대에서 벼슬을 시작하였다. 매사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 가설하였고, 화성을 축조할 때는 거중기(擧重機)를 만들어 실용화 하는 등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당시 집안의 매제인 이승훈의 영향을 받아 신문물인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는데, 천주교에 심취하였던 형 정약전은 신유박해 때 순교 당했다. 다행히도 정약용은 그를 아끼는 인물들의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련 없다’는 증언으로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전라도 강진 등으로 18년의 유배생활(1801-1818)을 하게 되었다. 그는 성호 이익(1629-1690)의 실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유배생활 중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 등 불후의 명저들을 집필하는 등 실학사상 고취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선진문물 수용 등을 주장한 북학파, 외교관 박제가(朴齊家)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약점을 극복하고 통역관, 외교관, 실학자가 된 박제가는 1778년 청나라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이후, 4번에 걸쳐 청나라를 왕래한 당시 글로벌한 최고 지식인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4대 강희제로부터 6대 건륭제까지 3대에 걸친 전성시대(1661-1796)를 이룩하여 세계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발전된 문물을 자랑하고 있었다.

박제가도 정조에 의해 특채(1779년)되어 청나라와의 외교 분야(별정직)에서 활약하였다. 1794년(4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현감 등의 벼슬을 하였으며, 당시 북학의 대가 연암 박지원에게 사사하며 능력과 이론을 겸전한 실력자로 평가받았다. 정조 사후, 그는 당파 회오리에 희생되어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갔고, 5년이 지나 돌아 온 후 불우한 노후를 보냈다.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인 박제가는 탁월한 경륜과 실력을 꽃 피우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인 추사 김정희 등으로 북학(北學)의 씨가 이어졌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천주교회 창설자 이승훈(李承薰)

정약용의 6살 손위 매형이었던 이승훈은 그보다 3년 먼저 1780년 소과(진사)에 급제하였지만 벼슬 보다는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천진암을 중심으로 천주 교리를 연구하던 이벽(李蘗. 1754-1786) 등과 교류하면서 천주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1783년 청나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연경(현 북경)에 가게 된 이승훈은 그곳 천주교회에서 영세(領洗)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이 되었다. 귀국 후,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터)에서 교리 전파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교직자인 신부(주교) 역할을 하였는데, 이것이 원래 교리에는 배치(정식 서품된 신부가 아님)되었지만, 이 해(1784년)가 우리나라 천주교회 창설로 인정받고 있다.

그 후 천주교가 사교(邪敎)라는 비판, 우리 전통적인 제사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이승훈 자신도 배교(背敎), 복귀를 되풀이하는 고뇌의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 승하 이후, 어린 임금 순조를 수렴청정하던 집권세력이 경쟁세력인 남인, 소론 중 시파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1801년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아까운 인재 이승훈은 중국의 주문모 신부와 함께 대표적 순교자가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발전,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은 존재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언제나 새로운 신진세력, 개혁사상이 기존 제도와 사회를 변화 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기득권 또는 반대파가 발목을 잡는 등 진통을 겪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18세기 영·정조 시대(1724-1800년), 소위 조선 르네상스로 사회 변혁의 기운이 무르익었으나, 정조의 죽음과 함께 쓰러졌고, 그 후 어리거나 무능한 왕(순조, 헌종, 철종)들의 즉위와 함께 세도정치가 지속되어 역사는 답보 또는 퇴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현재에도 수 백 년 이래, 역사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못하는 고질적인 정치인들, 그밖에 노조, 지역, 남북 간의 갈등들이 변화와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

그래도 이들이 꾸준히 소통하여 언젠가는 대타협을 이루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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